[상식반전] 독립문은 반일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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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7 15:59 | 최종 수정 2022.11.19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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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독립국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세운 독립문.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의 발의가 독립문 건립의 도화선이 됐다. 독립협회의 주도 아래 고종의 동의를 얻어 진행했다. 독립문은 서재필이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독일공사관의 스위스 기사가 설계를 맡았다. 총 공사비는 당시 화폐로 3825원.
독립문은 1896년 11월 21일 착공해 1년 뒤인 1897년 11월 20일 마무리됐다. 45cmx30cm 크기의 화강암 1850여 개를 전통적 기법으로 쌓아 올렸다. 높이 14.28m,너비 11.48m의 독립문 중앙에 아치형의 홍예문이 있고,홍예문의 중앙 이맛돌에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이화(李花·오얏꽃) 무늬가 방패 모양의 문양판에 새겨져 있다. 이맛돌 상단 앞뒤에 가로쓰기로 '독립문'과 '獨立門'이라 각각 쓰고,그 양옆에 태극기를 조각한 현판석을 달아놓았다. 1979년 성산대로 공사를 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m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옛 자리에는 '독립문지'라고 새긴 표지판이 있다.
독립문 소재지는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 독립공원 내에 위치해 있다. 독립공원에는 독립문을 비롯해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순국선열추념탑, 3·1독립선언기념탑, 독립관, 서재필 동상 등이 있다.
독립문은 반일(反日)의 상징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반청(反淸)의 상징이다. 조선이 더 이상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라 독립된 자주국임을 천명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갑오개혁(1894~1896)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19세기 말의 자주민권,자강운동의 기념물이다. 갑오개혁은 친일개화파 등이 주축이 돼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했던 개혁운동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독립협회는 청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한 시점을 독립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독립문이 들어선 위치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 자리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독립문 앞에 영은문 기둥을 받치던 밑돌인 영은문주초 2개가 아직도 있다.
영은문은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영빈관인 모화관(慕華館)의 정문이다. 모화관은 후에 독립관으로 용도 변경돼 독립협회의 사무실 겸 집회소로 사용했다. 영은문은 수백 년에 걸친 조선과 중국의 종속 관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독립협회가 발행하던 <독립신문〉은 1896년 6월 20일자 논설에서 독립문 건설의 취지를 다음과 밝히고 있다. "영은문 있던 자리에 새로 문을 세우되 이름은 독립문이라고 하고,새로 문을 그 자리에 세우는 뜻은 세계 만국에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표를 보이자는 뜻이요…"
글·사진=지식樂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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