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환의 책바퀴론] 책을 분류하는 방식에 구멍내기

도서관닷컴 승인 2022.09.30 11:13 의견 0

길을 걷다 보면 종종 물건 진열이 너무나 잘 돼 있는 곳을 보게 된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이끌려 들어가고는 한다. 진열대를 정갈하게 빈틈없이 채운 모습에 반한 것이다. 특히, 세계과자 전문점 앞을 지나칠 때의 그 유혹은 치명적이다. 젤리 코너는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 영롱한 빛깔과 당장이라도 한입 물어보고 싶은 모양새에 침이 고인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면 뭘 고르고, 먹어야 할지 선택하기 어렵다. 그래서 마지못해 두어 개를 사거나 빈손으로 가게를 나오기 일쑤다. 옷 가게에서도 마찬가지다. 무지개처럼 질서 정연하게 색상을 배치한 행거는 멀리서 볼 때만큼 가까이에서는 매력적이지 않다. 되려 무수한 선택지 앞에서 선택할 맛을 잃게 된다.

왜 그럴까. 물건들의 진열 방식이 말 그대로 '너무 질서정연'했기 때문이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질서를 갖추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질서의 외부자 시선에서 거리를 두고 볼 때 느껴지는 안정감과 그 아름다움이, 질서를 마주하고 선 내부에서는 불안과 혼란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그 질서가 꽤나 견고해 보여 자신이 파고들어 갈 틈이 보이지 않을 때, 그 정서적 크기와 무게는 압도적이다.

대형 도서관에서 수십만 권의 책이 한결같이 바르고 가지런하게 배가된 모습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정돈된 책장은 하나의 전체로 다가온다. 그러다 이내 파도처럼 변한다. 파도는 멀리 떨어진 모래사장에서 보면 자연의 법칙을 갖춘 해류의 운동이자 바다의 삶이다. 시원하고 멋있어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로 그 바다 위에 떠 있는 자가 마주하고 감각하는 파도는 마냥 아름답지 않다. 물살은 거세고 두려우며, 그 높이와 깊이는 쉬이 파악되지 않는 미지(未知)의 심연이다. 하나의 거대한 파도처럼 쏟아져 내릴 듯한 책장 앞에서는, 도대체 어떤 책을 골라야 하는지 두렵기까지 하다.

'도서관 불안(Library Anxiety)'이라는 개념이 있다. 멜론(Constance Mellon)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문헌정보학과 교수가 1986년 미국 남부의 대학생 6천여 명을 대상으로 2년 동안 도서관을 이용할 때의 불안에 관해 연구했다. 조사결과 불안의 주원인이 도서관 크기, 모든 것들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에 대한 지식 부족, 어떻게 정보를 찾기 시작할지에 대한 공포,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두려움 등의 순으로 작동했다. 학생들이 책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에 갔지만, 정작 들어가서는 무엇을 골라야 할지 두려운 데다가 질서의 거대함에 압도당한 것이다. 많게는 수백 년 이상 도서관 고유의 분류, 배가 체계로 정리된 장서들이 이용자를 작아지게 만드는 거대한 바벨탑처럼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도서관은 듀이십진분류법(DDC) 혹은 미국의회도서관 분류법(LCC)를 쓴다. 한국의 경우도 이 두 분류법을 주로 따르며 각 기관 사정에 따라 조금씩 변형해 사용하기도 한다. 이들 방식은 객관성과 통일성을 기반으로 장서 관리의 효율과 체계를 수립했다는 점에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반면, 서구·백인·기독교 세계관 중심의 분류체계라는 점과 그 위계에 따라 세계의 지식을 편성한다는 비판도 피할 수 없다. 이 양날의 검을 참작하고서라도 전통적인 분류 배가 시스템은 여전히 하나의 거대한 질서, 이용자가 적극 개입하기 어려운 공포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이에 우리는 기존의 전통적 분류에 다시금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의 도서관 분류체계가 과연 '완성된' 것인지 물어야 한다. 정보센터나 기관, 이용자와 지역 커뮤니티의 특성을 고루 고려한 새 분류와 배치 작업으로 도서관 곳곳에 구멍을 뚫을 수 있다. 작은 틈에서부터 거대한 터널까지, 질서에 뚫린 다양한 구멍을 통해 깊다란 불안 없이 책장 넘나들기가 쉬워진다. 한국에서도 몇몇 도서관이 이러한 시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수가 굉장히 미미하다. 로컬의 작은 도서관에서 시민들끼리 주체적으로 고유한 분류법을 만드는 소식까지 들리는 것도 단지 꿈은 아닐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2011년 영화 『멜랑콜리아』에는 저스틴이 언니의 서재에 전시된 책들을 마구 갈아치우는 광기 어린 장면이 나온다. 그녀는 기하학적 질서와 형상을 띤 책들을 알레고리적이고 감각적인 책들로 재배치한다. 이 장면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 문화예술인들에 회자되고 있다. 기존의 관습에 곧이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개성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의 상징으로까지 독해된다. 이미 아카이빙된 정보를 이용자의 요구, 동시대 감각, 큐레이터 혹은 사서의 비판적 혜안으로 재배치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견고한 질서가 우리의 정보 추구 능력과 지적 호기심을 삼키는 두려움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갖출 수 있다. 또 다른 혼돈과 불안이 야기되겠지만, 불안으로 불안을 다스리는 '불안과의 놀이'가 될 여지도 충분하다. 사람들이 그런 놀이의 주인공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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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환
연세대학교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현대문학)을 밟고 있다. 시인의 정체성으로 작품활동을 하는 중이다. 연극과 전시를 즐겨보며, 최근에는 여행의 맛에 빠져 여행미각을 개발 중이다. 인스타그램(@ppoetyy)에도 부지런을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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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바퀴론'은 책에 바퀴가 있어 그것이 구를 때마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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