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삼형제와 조카가 분당 율동공원 분수대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조영석 조카, 김재봉, 김재삼 형님, 필자.
옛날 충남 어느 마을에 마음씨 고운 형제가 살았다. 가을걷이가 끝난 달밤에 동생은 식구가 많은 형님이 걱정되어 몰래 볏단을 형님 집으로 옮겼다. 그날 밤 형도 이제 막 가정을 꾸린 동생이 걱정되어 볏단을 동생 집으로 옮겼다. 다음 날 아침, 형제는 깜짝 놀랐다. 밤새 볏단을 옮겼는데도 볏단이 그대로였던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형제는 다음 날 밤 다시 볏단을 옮기기로 했다. 그러나 형제는 서로 마주치고 말았다. 그때야 전날 밤 일을 알게 된 형제는 서로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옛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당시 어린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달 밝은 가을밤 볏단을 지고 동생은 형에게, 형은 동생에게 향하는 형제의 우애는 요즘 시대에는 좀처럼 보기 드문 달빛 수채화다.
사람이 한 생을 살아가며 맺는 인연은 수없이 많다. 친구, 스승과 제자, 직장 동료, 연인과 인연은 물론이고, 여러 사물과도 인연을 맺으며 살아간다. 이처럼 우리는 인연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인연은 삶의 즐거움이며 영양분이다. 그러나 그 많은 인연도 각각의 수명이 있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오랫동안 보지 않으면 멀어지고, 뜨겁던 사랑도 감정이 식으면 끝이 난다. 심지어 자식을 낳고 함께 살아온 부부의 인연도 이혼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남이 되고 만다. 이처럼 인연이란 한정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만 존재할 뿐, 영원한 인연은 드물다.
하지만 핏줄로 맺어진 인연은 다르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끊을 수 없는 천륜이며, 죽어서도 끊어지지 않는다. 제사상에 오르는 삼색 나물처럼, 죽은 뒤에도 이름 석 자는 따라다닌다. 호적등본을 떼보면 안다. 거기엔 부모, 형제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같은 핏줄로 태어난 인연은 삶이 끝난 뒤에도 지속된다. 우리 속담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다. 이 말은 서양에서도 'Blood is thicker than water'라고 쓰고 있다. 동서양에서 동일하게 쓰고 있는 이 속담은 한 핏줄의 인연은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다.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 그것이 곧 효요. 인간 최고의 애다.
가끔 돈 문제로 싸우는 형제를 보면 안타깝고 실망스럽다. 어려운 상황을 핑계로 받기만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무능이며 우애를 해치는 일이다. 형제는 부모처럼 무한한 책임을 지는 존재가 아니다. 기대기만 하기보다,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받되 겸손해야 하고 주되 생색 또한 없어야 한다.
7월의 분당 율동공원은 주변 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참 맑아 쌍쌍의 오리들이 물살을 가르고 호수 한가운데 분수대는 높게 흩뿌리는 물살로 더위에 지친 주민들의 땀을 식혀준다. 우리는 그늘을 걸으며 요즘 핫한 정치 얘기에 몰두한 나머지 그만 두세 시간을 훌쩍 걷고서야 벤치에 앉았다. "아따, 삼촌들은 아직도 정정하시오. 난 엄마 닮아서 무릎이 아픈디요." 큰누나 아들 조카 조영석은 본인도 이제 환갑이 넘어 무릎이 아프다며 너스레를 떤다. 아직도 현업에 바쁘면서도 삼촌들이 부르면 바람같이 달려와 말벗을 해주며 자기는 창녕 조씨지만, 유전자는 광산 김씨 엄마의 체질을 닮아 자기도 삼촌들과 똑같은 '광김'이라며 한바탕 웃는다.
우리는 해 질 무렵 공원 옆 보리밥집으로 갔다. 착한 가격에 맛이 뛰어난 이곳은 오래전부터 우리와 인연을 맺은 곳으로 산마루 능선길에 자란 연록의 산나물 반찬이며 텃밭에서 금방 따 온 푸성귀에 참기름을 넣고 너른 양푼 휘돌려 쓱쓱 비비면 막걸리는 저절로 잔을 넘치고 고봉으로 오른 숟가락이 입속에서 환하게 터지면, 발그레한 눈빛은 이미 서로에게 볏단을 옮기는 우리는, 의좋은 '광김' 형제들이다.
김재남(시인)
*문화일보(2025.7.16)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