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쟁이들이 책기둥을 무너뜨리고 원하는 책을 얻는다. 다시 기둥을 쌓는다. 난쟁이들은 책을 때리고 책을 향해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붓는다. 나는 그럴 만도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책은 무례하니까. 책은 사랑을 앗아 가며 어디론가 사람을 치우치게 하니까. 벽만 바라봐서 벽을 약하게 만드니까. 벽에 창문을 뚫고 기어이 바깥을 넘보게 만드니까."
윗글은 제36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문보영 시인의 『책기둥』 표제작 중 일부이다. 이 시에서 책기둥은 반듯하고 곧게 서 있는 기둥이 아니다. 언제라도 쓰러질 듯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피사의 사탑 같은 기둥이다. 시의 난쟁이들이 읽고 싶은 책은 책기둥의 맨 아래에 있는데, 위 대목은 난쟁이들은 책기둥을 무너뜨리고 원하는 책을 얻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원하는 책을 얻기 위해 책기둥을 무너뜨리지만, 다시 기둥을 쌓는다. 기둥을 이루고 있던 책들이 와르르 무너지면, 책이 쌓였던 순서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그 자리는 책들의 난장판, 책들의 무질서, 책들의 교통체증 상황이다. 책이 다시 쌓이면서 그것들의 위치와 구성은 재배치된다. 그렇게 다시 쌓이면 읽고 싶은 책은 늘 밑에 있게 되는데, 이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책 읽기란 지금까지 쌓아 올린 자신의 책기둥을 박살내고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언제나 무게 중심에서 가장 중요한 밑바닥에 힘의 균열을 내는, 일종의 도전처럼 여겨진다.
이 시의 난쟁이들은 책을 때리고 책에 침을 뱉고 욕까지 한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책기둥을 쌓아 올리는 난쟁이들의 난해한 난동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책이 '무례'하고 '사랑을 앗아'가며 '어디론가 사람을 치우치게' 하기 때문이다.
책이 무례하다는 표현은 책 읽기가 마냥 쉬운 것만이 아님을 암시한다. 쉽다는 것은 잘 읽히거나 이해하기 수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관점에서 쉬운 책은 비밀이 없는 책과도 같다. 비밀이 없어서 글을 읽는 자와 심리전을 펼치지 않는 경우인 것이다. 오히려 비밀을 감추고 있는 책, 드러난 언어로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 책은 어렵다. 어려워서 묘하게 끌린다. 어려움으로 우리에게 대결을 신청하는 책에는 친절함이 없다. '뭐 이리 어려워! 책이 잘못됐네'하고 책을 때리고 침을 뱉고 욕을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계속 책기둥을 쌓는 이유는 그 신경전의 즐거움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책이 사랑을 앗아간다는 표현은 중의적이다. 이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책을 읽느라 누군가를 사랑할 물리적 시간이 없어지는 것, 내가 알고 있던 사랑의 의미가 책을 통해 변화하는 것, 사랑의 대상이 책 자체가 되어 책과 사랑에 빠지는 것, 어쩌면 정말 책이 사랑할 기회를 빼앗는 것일 수도 있다. 무슨 해석이 합당하든 보다 중요한 건, 책이 '나'의 사랑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서적이든 간에 우리가 읽는 책은 내가 사랑에 참여하고 이를 실천하는 방식에 변화를 준다. 그 변화마저도 계속 변화하는데, 가장 밑에서부터 끄집어내는 책이 매번 기둥을 무너뜨리고 우리가 그 기둥을 다시 세우기 때문이다.
책이 어디론가 사람을 치우치게 한다는 건, 책을 비판적으로 읽는 과정을 암시한다. 시인은 다른 연에서 '겉은 꼿꼿하나 안은 어디론가 치우친 인간의 몸'을 말하며, '심장은 왼쪽으로 치우치고 간은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으나 사람은 똑바로 걷는다'고 얘기했다. 책 읽기는 글이 정치적 좌우 또는 중립이라 칭해지든 간에 이미 치우친 경험을 매개한다. 우리가 객관적 사실 혹은 팩트라 부르는 책도 치우친 것이며, 상식 밖의 것이라 부르는 것도, 하다못해 아무런 주제가 없는 책도 모두 치우친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공존이 세계를 지탱한다. 따라서 시의 '나'에게는 어떤 책이 어떤 방향으로 치우쳤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책이란 모두 치우친 것'이란 사실이다. 이는 책을 읽는 개인이 주체적인 위치에 있고자 하는 힘의 발산이다. 그 힘이 결국은 기둥을 무너뜨리는 데에 쓰인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이 모든 과정은 결국 벽을 약하게 만들고 벽에 창문을 뚫고 바깥을 넘보게 한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데 정작 책이 도서관 밖으로 나가게 한다는 것은 무얼까. 이 또한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세상에 설정된 여러 선입견과 경계를 허물고 그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기본일 것이다. 도서관 안팎의 경계가 흐려진다는 점에서 지식과 삶의 상호침투하는 모양새이기도 하다.
시인은 난쟁이들의 몸을 빌려 책을 읽는 것의 기쁨과 슬픔, 고통과 쾌락을 이야기한다. '낙이불음 애이불상(樂而不淫 哀而不傷)', 즉 즐거워하되 지나치게 현혹되지 않으며 슬퍼하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는 자세에 있다. 책기둥을 무너뜨리고 다시 쌓는 일에 동참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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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환
연세대학교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현대문학)을 밟고 있다. 시인의 정체성으로 작품활동을 하는 중이다. 연극과 전시를 즐겨보며, 최근에는 여행의 맛에 빠져 여행미각을 개발 중이다. 인스타그램(@ppoetyy)에도 부지런을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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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바퀴론'은 책에 바퀴가 있어 그것이 구를 때마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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