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환의 책바퀴론] "책 추천 좀"이라는 말의 공포

도서관닷컴 승인 2022.11.24 10:04 의견 0

대학에서 문헌정보학을 전공한 데다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하다보니, "책 추천 좀"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책을 추천해달라는 말을 '종종' 듣는 것은 '왕왕' 듣는 것과 다르다. '종종'과 '왕왕'의 사전적 의미는 모두 가끔을 뜻하지만, '왕왕'에서보다 '종종'이라는 말에서 긴장감이 생긴다. 그 이유는 '종종'의 다른 의미에 발걸음을 가까이 자주 떼며 빨리 걷는 모양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발을 '종종'거리는 중에 생기는 긴박함, 불안, 떨림, 공포가 '책', '추천', '좀' 사이를 배회하는 것 같다.

누군가가 책을 추천해달라고 묻는 게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상대가 싫어서의 문제가 아니다. 책 소개를 매개로 상대를 환대하는 방법에 익숙지 못한 내 탓인지도 모른다. 이 낯설고 서투른 책 추천 행위를 자연스럽게 해보려고 노력해봤지만, 자주 실패로 돌아가곤 했다.

"책 추천 좀"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반대로 "책?"이라고 굳이 되묻는 그 순간까지, 수많은 생각이 머리에서 들어오고 나간다. 어떤 책을 추천해줄까, 내가 소개해주는 책이 재미있을까, 상대는 무슨 책을 좋아할까, 독서 경험은 얼마나 되지, 내가 추천하는 책이 독이 되지는 않을까 등. 치기어릴 때엔 추천하는 책이 곧 나의 독서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 같아 민망하기도 했다. 벌거벗겨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한 번은 후배에게 메리 올리버의 책을 추천한 적이 있는데, 후배가 일주일 뒤에 "그 책이 저한텐 너무 어려웠어요"라고 말했다. 이건 후배의 탓도 나의 탓도 아니었다. 작가의 탓도 글의 탓도 아니었다. 그러나 무언가 실패한 기분이다.

이처럼 "책 추천 좀"의 상황은 요청을 하는 타인과 그에 감응하는 나의 내밀한 신경전인 동시에 공포와 침묵이 촉발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에 요동치는 오만가지 생각과 감정이 특정 책을 추천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하고, 머뭇거리고 주저하다 별 소득 없이 끝나기도 한다. 책 추천에 실패한다고 해서 그 질문을 건넨 대상과의 인간관계가 그릇되는 경우는 드물겠으나, 그 질문을 받은 이는 질문 받은 상황을 쉬이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사람과 헤어져 뒤돌아서면 생각나고, 혼자서 길을 걷다가도 생각나며,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생각난다. 의식과 무의식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책 추천 좀"은 트라우마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공포'의 이미지로 각인돼, 종종 유령처럼 회귀한다.

이 질문의 공포를 최전선에서 느끼면서 공포와의 놀이를 벌이는 대표적인 존재는 사서가 아닐까. 사서는 도서관 이용자가 어느 때고 "책 추천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묻을 때 요령껏 대처한다. 의무로 해야 할 때도 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종종' 있는 일이 그들에게는 늘 있기 마련이다. 사서의 책 추천은 성별과 나이, 이용자의 독서 경험과 학식을 불문한다. 오히려 사서는 질문을 받기 전부터 추천할 책을 찾아보기도 하고, 기존 책들과 신간 도서 사이를 배회하며 무엇이 새롭고 좋을지 고민한다. 사회와 지식에 매몰되지 않은 유연한 사고로 추천이라는 의미 자체를 아름답고 재치있게 재구성하기도 한다.

예전에 모 공공도서관에서 한 사서로부터 뜬금없이 그림책 한 권을 추천받은 적 있다. 그 책은 이지은 작가의 <이파라파 냐무냐무>였다. 겉으로 보면 굉장히 얇은 데다, 초등 저학년 도서로 구분되던 책이었다. 처음엔 사서의 추천이 의아했으나, 책을 읽은 후에는 사서의 선택이 정말 좋았고 굉장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언어가 살아 움직이는 방법, 예상하지 못했던 감동, 삶에서 지나쳐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새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사서의 추천 안목에 감탄하며 그동안 "책 추천 좀"으로부터 느낀 공포를 되돌아보게 됐다. 그 공포의 한구석에는 나의 선입견이 있었음을, 사서가 벌인 '공포와의 놀이'로부터 느낀 탓일게다.

아직 "책 추천 좀"을 들을 때의 당혹을 온전히 떨칠순 없다. 그러나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다. 조금 더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책 추천 요청을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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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환

연세대학교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현대문학)을 밟고 있다. 시인의 정체성으로 작품활동을 하는 중이다. 연극과 전시를 즐겨보며, 최근에는 여행의 맛에 빠져 여행미각을 개발 중이다. 인스타그램(@ppoetyy)에도 부지런을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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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바퀴론'은 책에 바퀴가 있어 그것이 구를 때마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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