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 인터뷰] 연세대 문성빈 문헌정보학과 교수

"문헌정보학자와 劍客은 내 인생의 두 바퀴 , 정년은 또 다른 도전의 시작이죠"

도서관닷컴 승인 2023.01.16 10:19 | 최종 수정 2024.10.06 23:35 의견 0

고정관념과 경계선 너머의 색다른 삶은 생경하고 신선하다. 문성빈(文聖彬·65) 연세대 문헌정보학과 교수의 삶이 그렇다. 문 교수는 현재 대한검도회 공인 8단이다. 학자이면서 최고수 검도인의 삶이 아주 특별하게 다가왔다. 공인 8단은 신의 경지에 이른 검도인이라고 불리는 검도입신(劒道入神)에 해당한다. 평생 후학을 가르치는 학자의 삶도 성공적이었지만 최고수 검도인의 삶도 빛난다. 최고수 검객이다 보니 그의 진짜 본업이 궁금했다. 새해의 첫 주인 1월 4일 서울 신촌 연세대 백양누리 '더라운지'에서 그를 만났다.

_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계기가 있었나요.

군복무(ROTC)를 마치고 1982년 7월 대기업 보험회사에 취직했다. 전공(문헌정보)과는 동 떨어진 길이다. 인사부 인력개발과에서 근무했는데 늘 바빴다. 그러던 중 아껴주고 믿어주던 대학 은사님이 연락을 했다. 외도를 끝내고 도서관으로 돌아오라는 손짓이었다. 일종의 질책도 섞여 있었다. 고민 끝에 1983년 3월 마음의 고향이던 도서관으로 유턴했다. 도서관의 새 직장(자연과학 참고사서)은 안정적이었으나 때론 정적했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있다'는 평소 지론대로 연세대 어학당에서 영어회화, 일본어 등을 꾸준히 배웠다. 이어 TOEFL‧GRE반에서 영어 공부를 더했다. 문득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전은 늘 나의 주요 모토였다. 때마침 검도부 선배이자 미국 유학을 했던 친척이 유학 길을 강권했다. 결국 1986년 9월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미국 유학 후 모교로

어학을 꾸준히 해온 덕분에 미국 대학원 진학은 큰 무리가 없었다. 6년 6개월 간의 미국 유학 생활은 가장(家長)학생으로 고군분투한 시기였다. 장학금을 받기도 했으나 학비와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틈나는 대로 아르바이트도 했다. 이런 형편 때문에 검도는 휴지기를 가져야 했다. 좋아하는 검도를 못한 시기는 군과 유학 시절 딱 두 번뿐이다. 미국에선 오직 학업의 길을 향해 달렸다. 마침내 그 길이 종착역에 닿았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헌정보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3년 5월 그리던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해 가을 학기부터 연세대 모교에서 시간 강사로 교단에 섰다. 당시엔 미국 유학파(정보학)가 많지 않았을 때였다. 몇몇 대학에서도 자리가 있었다. 결론은 모교였지만. 당시 인문사회 분야도 포닥(Post-Doc‧박사 후 연구원)을 요구했기 때문에 강사 신분은 자연스러웠다. 그보다 견제와 경계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행동에 조심하고 연구에 집중했다. 드디어 1995년 3월 전임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문 교수는 스스로 나서기 보단 묵묵히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체질적으로 선호한다. 그는 모교 교무처장(2010~2012), 대학원장(2014~2016) 등 요직을 거쳤다. 교무처장 시절에는 인천 송도캠퍼스 개교에 진력해 큰 성과도 이뤘다.

_정년을 하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지요.

올해 2월 퇴임하는데 총 28년을 교정에 있었다. 짧지 않은 세월이다. 추억 첩 중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컴퓨터 실습실을 만든 게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학과OB 동아리에서 십시일반으로 300만 원을 모금해 학과 기금으로 쾌척했다. 큰 힘이 됐다. 5~6대 컴퓨터로 시작한 실습실은 크게 확장됐다. 학부제 속에서도 전공분야(문헌정보)를 굳건하게 지키고 이어간 것이 뿌듯한 한편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전임을 맡아 학과제 1년을 하고 다음해인 1996년부터 2010년까지 14년 동안 학부제였다. 그렇다보니 과별로 보이지 않는 경쟁이 있었다. '문헌정보학 입문'을 가르쳤는데 수강생 30명을 90명까지 불렸다. 당시엔 복수 전공(Double major)이 기본이었다. 종합과학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이라 이중 전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파했다. 그 덕분인지 문헌정보 전공자는 줄지 않고 되레 늘었다. 순항에 큰 보람을 느낀다.

대학 때 검도 입문…흘린 땀은 배신하지 않아

_검도는 어떻게 입문하게 되었나요.

망설임이 없었다. 운동을 한다면 그냥 검도였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죽도(竹刀)를 처음 잡았다. 그렇다고 그 전에 어떤 운동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운동은 곧잘 했다. 반에서 농구, 축구 등의 경기를 하면 대표선수는 내 몫이었다. 작지 않은 키(176cm)가 도움이 됐으려나. 검도를 택한 동기를 굳이 찾자면 친척이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어릴 때 사촌형이 무도를 참 잘했는데 부러웠다. 태권도, 유도, 당수, 검도 등 단수를 모두 합치면 10단 정도. 사촌형은 검도를 해보라며 팁을 줬다. 나중에 꼭 배워 보겠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내향적인 성격을 외향적으로 바꾸고 싶었다. 학군사관후보생(ROTC)과 검도를 한 이유이기도 하다. 1학년 1학기 때는 대학생활을 즐기느라 검도는 후순위로 밀렸다. 어느 날 무질서하고 나태한 자신을 발견하고 반성했다. 2학기부터는 검도에 올인(all in)했다. 땀과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2년 만에 2단에 오른 뒤에는 각종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냈다. 국가대표 대학상비군에서 복귀한 4학년 때는 국내 대회에 나가면 거의 이겼다. 괄목할만한 성장이었다.

문 교수는 공부도 검도만큼 잘했다. 3학년부터 ROTC를 병행하면서도 학점은 늘 선두권에 있었다. 2학년 2학기 때 만점(4.0)에 도전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교련이 B학점이 되는 바람에 3.94에 그쳤다. '과톱'이었다. 고교 시절 한때 외교관을 꿈꿨다. 평소 도서관학과는 실용 학문이라 호감을 갖고 있었다. 대입 때 담임선생님이 연대 도서관학과를 추천했다. 이를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도서관학과는 나름 전망도 좋고 인기도 있었다. 당시는 예비고사, 본고사가 있었는데 본고사 경쟁률이 3대1쯤 됐다.

문 교수는 지난해 연말 현역 감독 등 우수 지도자들에게 주어지는 연세대 '이성구 체육인상'을 받아 또한번 놀라게 했다. 이성구 체육인상은 연세대에서 농구 지도자로 헌신한 이성구 선생(1911~2002)의 뜻을 기려 제정한 상으로 연세대 출신 우수 체육 지도자들에게 준다. 현직 대학 교수의 수상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는 어찌하다 보니 이런 상을 받게 됐다며 살포시 미소를 짓는다.

문 교수는 대학 3학년 때인 1978년 6월 전국 춘계 대학 검도연맹전에 출전했다. 대회에서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국가대표 대학상비군에 선발됐다. 한 학교에서 개인전 2명씩 출전해 토너먼트 경기를 치러 8강에 들면 자동으로 국가대표 대학상비군에 뽑히게 돼 있었다. 체육 특기생이 아닌 동호회 출신은 그가 유일했다. 당시 대한검도회에서는 입문 2년 6개월만에 8강에 오른 나를 보고 깜짝 놀랬다. 8강 선수들을 포함해 총 15명이 최종 국가대표 엔트리에 선정됐다. 한국 대표선수들은 합숙훈련을 거쳐 그해 겨울 도쿄, 오사카 등에서 한일전을 가졌다. 그는 지난해 10월 고시보다 더 어렵다는 공인 8단 승단시험에 다시 한번 도전장을 내밀었다. 결국 11번째 도전 만에 8단 등극에 성공했다. 당시 합격자 중 최고령자다. 현재 대한검도회 이사와 국제업무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다.

검도 공인 8단…지금도 배우면서 성숙

_공인 8단은 어떤 건가요.

검도인으로는 공인 8단이 오를 수 있는 최종 승단이다. 9단은 사실상 명예직이다. 8단은 우리나라에 대략 70여 명 정도 된다. 이중 실제 40, 50명이 수련을 하고 있다. 현재는 대학 때 검도에 입문해 8단에 오른 사람은 없다. 8단이 되려면 산술적으로 최소 32년이 걸린다. 한번도 낙오되지 않고 관문을 통과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다. 8단에 응시하려면 기본 자격 요건이 있다. 만 48세가 넘어야 한다. 또 7단 승단 후 10년이 지나야 한다. 8단 승단 심사때 42명이 도전해 대련 등 엄격한 심사를 거쳐 1차로 6명이 가려졌고, 2차로 4명이 최종 8단의 영예를 안았다. 지난해 11월 1일자로 단증을 받았다. 영광이고 자랑스럽다.

검도의 기본적인 장비는 죽도(약 510g)와 도복, 호구 등이다. 장비의 총 무게는 대략 6kg. 칼은 죽도와 목검, 진검으로 구분한다. 진검은 대개 4단 이상이어야만 소지가 가능하다. 문 교수는 "죽도를 가지고 내 몸과 같이 자유자재로 다루려다 보니 집중력이 생긴다. 또 항상 대나무 같이 바른 마음가짐과 자세가 필요한데. 이게 매력 포인트"라고 말한다. 대개 유도, 태권도 등 투기 종목은 4, 5단이 전성기다. 고단자라고 해도 이들과 대련하면 이겨낼 재간이 없다. "젊은 선수들과 대련하면 이길 수 없겠죠" 다소 엉뚱한 궁금증이다. 되치기한 첫 마디가 "검도는 달라요"였다. 그는 "아무래도 힘들겠지만 시합이 아닌 대련이라면 검도는 다이내믹한 기술로 순간적으로 제압하는 무도이기 때문에 고단자일수록 내공이 쌓여 절대 밀리지 않는다"며 "이게 검도의 묘미"라고 말한다.

문 교수는 검도의 가장 큰 장점으로 평생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그는 "나이가 60대 중반쯤이면 태권도나 유도를 하는 것은 버겁고 힘들다. 하지만 검도는 정중동(靜中動)과 기술로 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노년에도 평생 즐기며 할 수 있다"고 말한다. "8단이 되었지만 지금도 배우면서 성숙한다"고 자기를 낮춘다. 1주일에 이틀, 하루에 2시간 정도를 빼놓지 않고 수련하고 있다.

공자는 "영예로운 자는 넘어지지 않는 자가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 자"라고 했다. 문 교수가 그렇다. 그는 "인생의 참 즐거움은 끊임없는 도전에 있다. 내 인생관이 늘 도전을 하는 것이다. 슬럼프도 있고, 실패도 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을 하다보면 언젠가 자기가 이룬 목표를 이룬다"고 말한다. 그 도전이 그에게는 검도인 듯했다. 퇴직 후의 인생 2모작은 검도에 더 집중한다고. 아시아연맹을 만드는 일에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

문 교수에게서 '기위(氣位·기품과 위엄)'가 느껴진다. 그는 '겸검위락(兼劍爲樂)'의 실천자다. 검도와 함께 즐거움을 얻고 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그의 새로운 도전은 계속된다.

김규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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