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환의 책바퀴론] 책향,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냄새들

도서관닷컴 승인 2023.04.02 21:39 의견 0

5년 전 생일, 봉사단 후배들이 돈을 모아 향수를 선물해준 적 있다. 기념일 향수 선물이 흔한 시대라지만, 그 향수는 특별했다. 북퍼퓸(Book Perfume)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교내 '연세문학회'라는 문학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연세문학회는 1941년 윤동주 시인이 만든 '문우'에서 시작해 1958년 정현종 시인이 현재의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는 모임이다. 내게 "단장님의 학교 선배인 윤동주가 생각나서 윤동주향으로 준비했다"며 맞춤 선물을 해준 것이다.

향수에는 '신선한 가을 밤,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별을 헤는 청년'이라는 문구와 함께 향 구성이 소개돼 있었다. 베르가못과 과일향의 탑 노트, 바이올렛과 로즈 제라늄의 미들, 우디와 그린노트 베이스 노트로 마무리됐다. 처음으로 책 향수를 선물 받은 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읽고 있던 시집에 듬성듬성 뿌렸던 기억이 난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무수한 밤하늘의 별을 헤아린 적은 없었으나, 책과 향이 어우러져 만드는 또다른 우주의 궤도를 상상하는 일이 행복했다. 향을 통해 중력이 다른 공간을 상상하는 순간이 소중했다.

얼마 전, 미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에 학술대회 차 방문했다가 그 주 남동부의 작은 사막인 조슈아트리국립공원에 다녀왔다. 온종일 그곳을 다니다 캄캄해진 사막 한 가운데서 무수한 별들을 봤다. 사막의 밤은 매섭고도 엄격했으며, 바람이 맹수의 울음소리 처럼 들리는 암흑밭이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지는 어둠에서 오롯이 감각되는 것은 수많은 별들과 나뿐이었다.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구름이 바람에 쫓기듯 도망가는 때, 놀랍게도 별이 하늘에서 움직이는 듯 보였다. 윤동주 시인이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고 쓴 이유가 단숨에 감각됐다. 차마 헤아릴 수 없이 바람을 스치는 듯한 밤, 그 밤을 올려다보는 자신을 만났다. 그때 코 끝에서 어떤 향이 느껴졌다. 향수 입자들이 어떤 기억을 싣고 와 다른 시공간을 연결해주었다.

별을 보고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봤다. 사진첩에서 북퍼퓸을 선물받은 그 날의 메모를 뒤져보았다. 그 당시 친구들의 목소리와 얼굴, 선물 받은 날의 기분과 감정, 그 향을 뿌린 책의 표지와 질감, 도둑고양이처럼 나타난 아름다운 문장들, 쪽 끄트머리를 책갈피처럼 접어놓은 감동이 되살아났다. 별과 바람이 움직인 것처럼 보인 사막의 밤까지 얽혀 기억의 냄새가 달라졌다. 그 마음을 가지고 한국에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향수 보관함에서 윤동주향과 비슷한 향수를 꺼내 책 곳곳에 뿌렸다. 5년 전과 다른 향이었지만, 다르지만은 않았다. 그 유사함은 기억과 추억의 입자들이 부딪친 파동의 날개짓같은 것이리라.

향을 맡으며 밤 사이 읽은 글은 데니스 존슨의 「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라는 단편 소설이었다. 그 글에는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과거와 현재의 나, 읽었고 읽는 중인 책, 북퍼퓸을 선물해준 친구들, 별과 바람, 시와 소설, 서로 다른 시공간과 다른 우주처럼 펼쳐지는 감각들, 모든 것들이 낱낱의 입자처럼 다가왔다. 모든 입자들에 이름과 무게가 있는 것처럼. 그 입체성이 분사되며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책에 내려앉은 새로운 향이 이 모든 것을 한데 아우르며 이질적이었다. 그리하여 또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듯했다. 책의 향을 통해 다른 중력의 미지로 여행을 하는 것이 얼마나 매혹적인가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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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환

연세대학교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현대문학 박사과정 연구자로 있다. 시인의 정체성으로 작품활동을 하는 중이다. 연극과 전시를 즐겨보며, 최근에는 여행의 맛에 빠져 여행미각을 개발 중이다. 인스타그램(@ppoetyy)과 개인 홈페이지(Jonghwanyoon.kr)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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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바퀴론'은 책에 바퀴가 있어 그것이 구를 때마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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