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5월 16일을 기해 전기요금을 5.3%(㎾h당 8원) 인상했다. 물가는 여전히 높고 실질소득은 감소해 가계에 적지 않은 부담을 주게 됐다.
4월 10일은 전기의 날. 1900년 이날, 민간 최초로 서울 종로 네거리 전차 정거장과 매표소 주변에 전기 가로등을 달아 처음으로 불을 밝혔다. 그런데 한반도 땅에서 제일 먼저 전깃불이 켜진 것은 이보다 13년 앞선다.
1887년 3월 6일, 경복궁의 건청궁(乾淸宮)에서 고종과 명성황후 등이 참석한 가운데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1호 점등식이 열렸다. 건청궁은 1873년 고종이 조성한 궁궐 속의 작은 궁궐. 건천궁 내 향원정 연못가의 발전기 소리가 마치 천둥이 치는 듯했다고 한다.
설비는 당시 동양에서는 가장 우수한 것으로 16촉광의 백열등 750개를 점등할 수 있는 규모였다. 성능이 완전치 못한 탓에 자주 불이 깜박거려 '건달불(乾達火)'이라 불렀다. '물불', '도깨비불' 등 별명이 여럿 있었다. 에디슨이 백열전등을 발명한 지 불과 7년 5개월 만에 조선 땅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과학문명의 빛을 밝혔으니 그야말로 대사건이라 할 만했다.
토마스 앨바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1931). 그는 축음기, 백열전구, 축전지, 영화 촬영기 등 1000여 개의 발명품을 인류에게 선사했다. 그의 위대한 발명품 중에 가장 획기적인 것이 바로 전구다. 그는 백열전구를 보급하기 위해 소켓, 스위치, 안전퓨즈, 적산전력계 등을 고안하고 효율이 높은 발전기 배전반도 만들었다.
에디슨은 '발명왕', '과학의 마술사', '발명계의 나폴레옹'으로 칭송받는다. 그의 업적은 그 누구보다 위대하다. 1931년 10월 18일 에디슨이 타계한 날, 미국 전역에서 1분 동안 전등을 꺼 그를 추모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에디슨은 수많은 업적과 세계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후보에 올랐지만 인연은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 중 한때 전기와 관련된 발명을 위해 함께 연구하기도 했던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1856~1943)와의 대립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크로아티아 출신인 테슬라는 비록 에디슨의 그늘에 가려 있었지만 뛰어난 과학자였다. 테슬라는 발명을 상업적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에디슨과 종종 충돌했다. 그러던 중 테슬라가 교류(AC) 유도 전동기와 교류 송전에 적합한 변압기를 발명하고 이를 추진하려 했다. 반면 에디슨은 자신이 발명한 전구의 수요를 늘리기 위해 직류(DC)를 고집했다. 결국 두 사람은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별했다.
후에 테슬라의 주장대로 교류 시스템이 월등히 좋다는 결과가 나왔고, 전류전쟁은 테슬라의 승리로 끝났다. 테슬라는 생전에 '매드(mad) 사이언티스트'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일론 머스크가 최대주주인 전기자동차 테슬라 사명이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노벨상위원회는 1912년 전기 보급으로 인류에게 획기적인 기여를 한 에디슨과 테슬라에게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주기로 했다. 하지만 테슬라는 에디슨과 함께 노벨상을 받기 싫다며 이를 거절했고, 그 해의 노벨 물리학상은 등대를 개선한 닐스 구스타프 달렌에게 돌아갔다. 에디슨은 1928년 '에디슨 효과'로 또 한 번 노벨상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에디슨은 이번에도 지난 과거 때문에 수상자 명단에서 제외되는 불운을 겪었다. 대신 에디슨 효과를 물리학적으로 설명해낸 영국의 물리학자 오언 리처드슨이 노벨상을 받았다. 에디슨은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뤄진다'는 말을 남겼다.
*'한국아파트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김규회의 色다른 상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