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반전] 유명예술인들의 에펠탑 혹평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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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닷컴 승인 2023.07.04 14:16 의견 0

프랑스 파리가 최근 테니스 제전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살아있는 레전드' 노박 조코비치(36·세르비아)는 6월 11일(현지시간) 프랑스오픈(롤랑가로스)에서 신예 영건들의 도전을 제압하고 그랜드슬램 통산 23승(최다)이라는 위업을 이뤄냈다. '무결점' 경기로 또 한 번 건재함을 과시했고 진정한 'GOAT(the Greatest Of All Time·역대 최고 선수)'임을 입증했다. 그는 파리 에펠탑을 배경으로 우승 트로피에 입맞춤하며 불멸의 대기록을 자축했다.

에펠탑(Eiffel Tower). 이제는 파리의 랜드마크(landmark)를 넘어 프랑스의 상징으로 불린다. 파리 시민과 프랑스 국민의 자부심이다. 프랑스와 유럽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에 맞춰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건설됐다. 한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여성들이 프러포즈를 받고 싶은 곳 1위가 에펠탑이라고 한다. 전망대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파리의 야경이 달콤한 로맨스에 딱 어울리는 모양이다.

에펠탑은 프랑스의 건축공학자이자 설계자인 귀스타브 에펠(Alexandre Gustave Eiffel, 1832~1923) 이름에서 따온 명칭. 그는 유럽 각지의 수많은 철교를 설계하며 국제적 명성을 쌓았다. 뉴욕 '자유의 여신상'의 내부 설계와 파나마 운하의 공사에도 참여했다. 그는 불후의 작품인 에펠탑의 건설로 '철의 마술사'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그만큼 당시로서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획기적인 건축물이었다.

에펠탑은 산업화 시대의 개화를 의미했다. 돌을 재료로 하는 건축의 시대에서 철의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전환점이기도 했다. 에펠탑에 쓰인 철의 물량은 7300여 톤. 2년 2개월 5일의 공사 기간을 거쳐 1889년 3월 31일 대역사(大役事)가 마무리됐다. 탑의 높이는 약 300m. 1930년 뉴욕 크라이슬러 빌딩이 세워지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후에 통신용 안테나와 피뢰침까지 덧붙여져 최대 높이는 330m가 됐다.

프랑스는 에펠탑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자유를 상징하는 삼색기(프랑스 국기로, 파랑은 자유, 하양은 평등, 빨강은 박애를 상징)를 휘날렸다. 에펠탑은 처음부터 파리의 상징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공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예술성과 공업성, 추함과 아름다움을 놓고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한 수학 교수는 공정이 3분의 2 정도 진행되는 단계에서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것으로 예상했다. 많은 지식인들과 시민들은 예술도시 파리의 미관을 망치는 혐오스러운 쇳덩어리라며 에펠탑 건립을 반대했다. 소설가 기 드 모파상, 에밀 졸라, 알렉상드르 뒤마, 작곡가 샤를 구노 등 유명 예술인들은 '파리의 수치','흉물스러운 철덩어리','천박한 이미지'라며 비판에 앞장섰다.

특히 대문호 모파상은 혹평가들 중에서도 에펠탑에 대한 반감을 평생 유지한 인물이다. 모파상이 종종 탑의 2층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그 이유가 그곳이 파리에서 탑이 보이지 않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모파상의 식사 습관이 그의 반감을 달래주는 데 충분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1890년 처음 발표한 단편소설 '방랑생활'에서 에펠탑에 대한 감정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소설에서 "나는 에펠탑 때문에 파리, 아니 프랑스를 떠났다. 이 거대하고 흉측한 뼈대를 벗겨버리지 않는다면 우리 세대를 어떻게 생각할지 염려스럽다"며 혹평을 늘어놓았다.

에펠탑이 프랑스 최고의 상징물로 인정받게 된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이다. 당시 누가 에펠탑이 프랑스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을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한국아파트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김규회의 色다른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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