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반전]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 어디에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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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5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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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남선녀들이 푸르른 5월에 백년가약의 꽃을 피운다. 봄철을 맞아 날아드는 청첩장. 결혼식 장소가 럭셔리한 특급 호텔이라면 축의금 고민이 깊어진다.
'호텔' 하면 고급스럽고 화려한 분위기가 연상된다. 호텔의 손님은 customer가 아닌 guest다. 최고의 예우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서울 시내 주요 5성급 호텔의 결혼식 비용은 각종 옵션을 추가하면 1억 원을 넘는다.
호텔(hotel)의 어원은 라틴어 '호스피탈레(hospitale)'에서 비롯됐다. 심신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이 말이 호스피탈(hospital), 호스텔(hostel), 인(inn), 호텔(hotel)의 변천 과정을 거쳤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 때는 역(驛), 고려 때는 객사(客舍), 조선 때는 역(驛)·원(院)·여각(旅閣)·객주(客主)라고 불렀다.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을 계기로 현대식 기업 형태의 호텔이 등장했다. 1850년에 세워진 프랑스의 그랜드 호텔이 유럽의 호화 호텔 1호로 꼽힌다.
호텔 등급의 표시 형식은 나라마다 다르다. 우리나라는 무궁화, 미국은 다이아몬드, 유럽은 별로 등급을 표시한다. 우리나라 호텔은 특1등급(황금 무궁화 5개), 특2등급(녹색 무궁화 5개), 1등급(무궁화 4개), 2등급(무궁화 3개), 3등급(무궁화 2개)으로 구분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은 서울에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했던 인천이 먼저다. 인천항에는 1883년 개항과 함께 각국의 외교사절, 여행객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목적지가 서울이었는데 철도가 놓이기 전이라 인천에 도착해서는 대개 하룻밤을 묵었다.
이런 사정을 간파한 일본인 해운업자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는 인천 중구 중앙동에 호텔을 지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나라 호텔의 효시로 불리는 대불(大佛)호텔이다. 1887년 착공해 1888년(고종 25년) 완공했다. 벽돌식의 3층짜리 양옥 건물로 서양식 침실과 식당을 갖췄다. 외벽만 벽돌로 쌓고 내부는 목조 건축물이었다. 침대가 있는 객실은 11개, 다다미(마루방에 까는 일본식 돗자리)방은 240개에 달했다. 객실별 숙박료는 상급 2원 50전, 중급 2원, 하급 1원 50전이었다. 당시 일본식 여관의 상급 객실 숙박료인 1원과 비교하면 비쌌다.
대불호텔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러나 경인선 철도가 1899년 개통되면서 숙박수요가 줄자 1918년 중국인에게 팔려 '중화루(中華樓)'라는 식당으로 간판을 고쳐 달았다. 중화루는 한때 문전성시를 이룰 만큼 명성을 떨쳤다. 결국 1978년 건물이 헐리면서 대불호텔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된다.
이후 최초라는 기록을 가진 현대식 호텔들이 속속 생겨났다. 그 중심에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알려진 손탁호텔이 있다. 주한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의 가족을 따라 서울로 온 프랑스계 독일 여성 앙투아네트 손탁(Sontag)이 1902년 정동의 경운궁 건너편에 있는 땅을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아 지은 호텔이다. 2층은 황실의 귀빈을 모시는 객실로, 1층은 보조 객실·식당·회의실 등으로 사용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투숙하며 조선 대신들을 불러내 회유, 협박한 장소로 러·일 전쟁 때는 후에 영국 총리가 되는 윈스턴 처칠이 묵기도 했다.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호텔은 조선호텔(현재 웨스틴조선호텔)이다. 진정한 의미의 한국 최초의 근대식 호텔이다. 일제 강점기 치하인 1914년 서울 소공동에 건립된 조선호텔은 첫 엘리베이터와 댄스파티 등 숱한 국내 최초 기록을 쏟아내며 신(新)문물의 창구로 유행을 선도했다.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상용 호텔인 반도호텔이 1938년 준공되고, 1952년 최초의 민영 호텔인 대원호텔이 등장했다. 최초의 휴양지 호텔인 워커힐은 1963년 선보였다. 모던보이의 핫 플레이스였던 호텔의 변신은 오늘도 계속된다.
*'한국아파트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김규회의 色다른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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