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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3 18:10 | 최종 수정 2024.06.1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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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지인의 소개로 그 지인의 형이 당사자인 형사사건 관련 전화 상담을 한 적이 있다. 직접 당사자도 아닌 그 가족이라서 그럴까? 대화가 겉돌기만 했다. 변호사의 열정이 중요하다거나, 열정 없는 변호사를 만나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적이 있다는 식의 말만 늘어놓았다. 아마 의뢰인은 내가 공감해주거나, 나는 '열정이 있는 변호사입니다'라는 답변을 기대하는 듯했다.
'열정(熱情)'은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돈을 내고 변호사를 산다'고 생각하면서 '열정'까지 바라는 것은 너무 큰 기대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지방이지만 그리 멀지도 않으면서 사무실로 직접 찾아오지도 않고 전화로만 변호사의 열정을 확인해보려는 의뢰인의 태도가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하는 것 이상 벌고 싶고, 받은 것 이상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받은 것 이상 일을 하려면 열정(熱情)이 필요할 텐데, 그러려면 의뢰인이 나와 아주 긴밀한 관계이거나, 사건 자체가 매우 흥미롭거나, 혹은 변호사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사건이라야 한다. 방문도 하지 않고 전화로만 '변호사로서 열정이 있냐'고 되묻는 의뢰인의 우매(愚昧)한 자세에 안타까울 뿐이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소송을 경기(競技)라고 가정하면, 판사는 심판이다. '누가 더 경쟁력있게 잘 싸우냐'를 가려 그것이 진실이고, 정의라고 보는 것이 민사와 형사재판의 기본 원리다. 민사재판에서는 변론주의라고 하고, 형사재판에서는 당사자주의라고 한다. 이는 소송 구조의 기본 원칙이다.
그런데 민사든 형사든 재판은 기본적으로 아주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큰 쟁점이 없어 보여도 1~2년은 훌쩍 지나간다. 1심 재판일 때도 그렇다. 그렇다보니 어떤 감독과 선수를 기용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소송에서 어떤 감독과 선수 즉, 변호사를 선임할지는 전적으로 당사자의 선택에 따른다. 선택이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의뢰인의 경제적 능력과 절박함에 귀결될 수 밖에 없다. 물론 경제적 능력이 부족해도 절박한 사정으로 인해 선임료가 비싼 변호사를 선임할 수도 있다.
개인이 큰 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이 힘든 이유가 있다. 개인은 본인의 이해관계만으로 변호사 선임료를 책정하게 되지만, 회사는 상대방이 한 명이라도 동일한 쟁점의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을 상대한다고 생각해 대응하게 되고, 경제적 능력과 절박함이 한 개인의 이해관계를 압도하게 된다.
그렇다면 개인과 큰 회사와의 소송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일 수 밖에 없다. 마치 한국 프로축구 2부 리그 팀이 영국 프리미어리그 팀과 축구를 하는 격이다. 재미있는 점은 세계 최고의 축구리그인 영국 프리미어리그도 최근 샐러리 캡(연봉상한제)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 그런데도 치열하게 법리를 다투는 소송에서 수년에 걸쳐 선수에 해당하는 변호사 선임료의 수준을 조율하는 제도는 없다. 참 놀랍다.
필자가 20년 가까이 경험한 민사소송은 복잡한 사건일수록 결국 지치는 쪽이 불리하고 패소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최후의 보루가 변호사의 열정일 수 밖에 없고, 의뢰인은 선임한 변호사의 열정을 기대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의뢰인의 운(運)일 수 밖에 없는 것인데, 과연 마땅한지 의구심도 든다.
차라리 민사소송이라면 선임할 변호사의 수와 경력, 선임료 규모를 애초 맞추도록 강제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나 싶다. 특히 한 개인이 대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이라면 더욱 그럴 필요가 있지 않을까.
박원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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