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식의 밑줄긋기(3)] "우리 시대 인문학자 김열규의 마지막 사색"

도서관닷컴 승인 2024.09.24 10:46 | 최종 수정 2024.09.27 11:13 의견 0

김열규 『아흔 즈음에』 (2014)

(휴머니스트 / 256쪽 / 1만3500원 / 2014년 1월 13일 1판 1쇄 발행 / 2014년 2월 3일 1판 2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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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김열규 교수의 유고집 《아흔 즈음에》는 그의 생애 마지막 시기에 쓴 에세이다. 인생의 의미와 죽음, 고독, 사랑, 자연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고 있다. 이 책은 그가 82세 혈액암 투병 와중에 집필했다. 개인적이고 내밀한 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 책의 주요 내용은 노년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다. 시간이 어떻게 인생을 형성하는지를 탐구했다. 그는 "산다는 것, 그것은 시간 쓰기"라며 인생의 가치가 시간의 사용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시간이 단순히 흐르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경험과 감정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는 죽음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인생의 끝자락에서 느끼는 고독과 불안,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하는 평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은 그가 사랑과 인간관계, 자연과의 관계를 통해 얻은 통찰을 공유한다. 이웃과의 관계, 자연 속에서의 자아 발견을 통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했다. 단순한 에세이를 넘어,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철학적 성찰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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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이 든다는 것]

9는 무엇인가가 가득 차고, 가장 높고, 가장 길고, 으뜸으로 많다는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사람 나이 구순(九旬), 곧 아흔 살을 예사로 여길 일이 아니다. 찰 만큼 차고 높을 만큼 높아진 나이로 대접해야 한다. 거룩하고 귀하고 소슬한 나이로 받들어야 한다. 무시로 아흔을 미리 짚어보곤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흔을 미리 짚으면서) p24

문득문득 생각에 잠길 때가 많다. 묵념이랄 것도 없고 묵상이랄 것도 없는 채로 우두커니 고개 숙이고 앉아 있는 경우가 잦다. 그럴 때, 구부린 허리 위로, 숙인 고개 위로 여생을 비추는 여광이 고여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여생이란 말 떨어내고 싶은데도) p27

삶은 곧 시간이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시간 보내기인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 보내기란 말이 그야말로 '허송세월', 곧 헛되이 시간을 날려버리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면 말을 고쳐야 한다. '시간 보내기'란 말은 피하고 '시간 쓰기'라는 말로 바꾸어야 할 것 같다. 보람되고 값어치 있게, 그리고 뜻 깊게 시간을 활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 시간 쓰기) p28

심리 상태가 한바다에 따로 떠 있는 작은 섬이 되고 마는 것, 그게 고독이다. 외진 마을, 뒤는 산이고 앞은 바다인 그런 텅텅 빈 공간에 목숨 기대고는 혼자 내버려진 듯이 웅크리면서 나의 고독은 깊어지고 짙어지게 된다. 고독이라는 깊디깊은 웅덩이에 빠지고 만다. (외로움에 저리고 저려서) p42

[2. 죽음을 생각하면서]

할아버지 산소를 통해 주어지던 죽음에 부치는 느낌이 내가 죽음에 대해 품게 되는 생각의 싹이 되면서, 그것은 두고두고 나의 죽음에 부치는 생각에서 큰 구실을 했다. 뭐랄까. 고요함, 포근함이 깃든 것으로 내 가슴에 어리게 된 것 같다. 내게서 '메멘토 모리', 이를테면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에는 무서움이나 두려움보다는 안식이나 편안함이 더한층 크게 사무쳐 있곤 한 것이다. (꼬맹이 시절 무덤에 부치던 생각) p71

[3. 글쓰기에 기대어]

책 읽기는 지적인 방랑이요 정서적인 표박이다. 구름 떠가고 물 흐르듯 책의 행간을 소요하는 마음이 아닌 바에 책은 얼마나 답답한 검은 활자의 사막인가. p82

일에 달라붙을 적마다 떠오르는 정경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마지막 결승선을 향해 바싹 다가들고 있는 육상선수의 모습이다. 인생이란 경주의 결승선을 바로 지척에 두고 나는 더한층 읽기를 하고 또 쓰기를 해야 한다. 스스로 거듭 그렇게 다짐 두고 있다. (결승선이 가까워질수록 더한층 빨라지는 육상 선수처럼) p107

[4. 그리운 시절]

나는 한 번도 시간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다만 뒷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까마득한 길 끝에서 먼지처럼 사라져가는 뒷 꼴을 먼빛으로 보았을 뿐이다. p110

지난날은 만물상 같은 것, 별의별 것이 두루뭉술하게 얽히고 섞여 있다. 아리고 쓰린 상처가 스멀거리는가 하면, 흥겨움이며 신명이 깃든 자국들이 돋기도 한다. 헤집고 보면 볼수록 속이 깊어지고, 그래서 그늘도 곧잘 짙어지기 일쑤다. 햇살 맑은 양지도 깃들이게 된다.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p112

[5. 함께 산다는 것]

기뻐서 날뛰게 하지 않는다. 슬퍼 통곡하게 하지도 않는다. 흥청거리도록 취하게도 하지 않는 것이라야 정겨운 것이다. 그것은 잔잔한 침잠이고 가벼운 도취고 고요한 공감이다. p156

부부 사이의 정은 함께 겪은 세월의 길이가 길수록 서로 간에 더 깊이, 더 진하게 스미고 다져지곤 한다. (나이 들 만큼 든 뒤의 정, 사랑) p167

[6. 자연 품에서]

자연은 보이지 않는 것, 불확실한 것에 다다르는 관문이다. 자연은 구체적으로 거기 존재하면서도 우리에게 잡히지 않는 것의 귀함을 보여준다. p186

커다란 호수 같은 자란만 바닷가를 걸으면, 잔물결이 내 마음을 다독거리는 정이 된다. 차근차근 걸음을 옮기는 데 따라 백사장 모래는 나의 발길을 감싸고 돈다. 온몸을 내맡기고 싶도록 정겨움을 맛본다. 바다며 산, 자연을 정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보다 더한 삶의 축복은 없다. (바다, 그 또 다른 요람) p188

내일, 모레, 글피쯤이면 아흔이 될 이 나이에 마음만은 어김없이 나무로 살고 싶다. 그리하여 소슬하되 다소곳하고, 우람하되 고즈넉하게 노년의 삶을 다듬고 싶다. (닫는 글 _ 나도 나무이고 싶다) p225

내게 가장 익숙한 아버지의 모습은 물론 연구를 하시거나 책을 읽으시거나 글을 쓰시는 것이다. 한여름 거실의 앉은뱅이 책상, 34도쯤의 열기. 그러나 아버지는 꼼짝도 않고 원고지를 채우셨고, 등 뒤로 땀이 쉼 없이 흘렀다. 내게 이 장면은 글짓기 노동이 원형처럼 새겨져 있다. (추모의 글 : 흰 벽 앞에서 - 김소영, 큰딸,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p233

지금도 선생님과 함께 했던 곳을 지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지만, '삶의 진지함'이란 무엇인지, '삶의 성실함'이란 무엇인지 그때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삶을 가르쳐주신 스승 - 곽진석, 제자,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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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1932~2013)

1932년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국문학 및 민속학을 전공했다.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거쳐 동 대학원에서 국문학과 민속학을 전공했다.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 객원교수, 인제대학교 문과대학 교수,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원장,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등을 역임했다. 1963년 김정반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당선됐다. 문학과 미학, 신화와 역사를 아우르는 그의 글쓰기의 원천은 탐독이다. 어린 시절 허약했던 그에게 책은 가장 훌륭한 벗이었으며,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두고 간 짐 꾸러미 속에서 건진 세계문학은 그에게 보물로 간직됐다. 이순(耳順)이던 1991년,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같은 삶을 살고자 고성으로 낙향했고, 자연의 풍요로움과 끊임없는 지식의 탐닉 속에서 청춘보다 아름다운 노년의 삶을 펼쳐 보였다. 여든의 나이에도 해마다 한 권 이상의 책을 집필하며 수십 차례의 강연을 하는 열정적인 삶을 살다가 2013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연구 인생 60여 년을 오로지 한국인의 질박한 삶의 궤적에 천착한 대표적인 한국학의 거장이다. '한국학'의 석학이자 지식의 거장인 그의 반백 년 연구인생의 중심은 '한국인'이다. 문학과 미학, 신화와 역사를 두루 섭렵한 그는 한국인의 목숨부지에 대한 원형과 궤적을 찾아다녔다. 특히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와 『한국인의 자서전』을 통해 한국인의 죽음론과 인생론을 완성했다는 평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 『김열규의 휴먼 드라마 : 푸른 삶 맑은 글』, 『한국인의 에로스』, 『행복』, 『공부』, 『그대, 청춘』, 『노년의 즐거움』, 『독서』, 『한국인의 신화』, 『한국인의 화』, 『동북아시아 샤머니즘과 신화론』, 『아흔 즈음에』 등이 있다.

독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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