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책벌레'가 아닌 '책 읽는 말'의 나라 아이슬란드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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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3 11:04 | 최종 수정 2023.02.26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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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만 파묻혀 사는 사람을 놀림조로 '책벌레(Bookworm)'라고 한다. 책 읽는 사람 자체가 희소해지는 추세이니, 아마도 이 단어는 머지않아 사어(死語)가 되지 않을까 싶다.
독서 애호가를 굳이 '벌레'라 비유한 것이 우리나라만의 반지성주의적 풍토인가 궁금해서 다른 나라는 어떤지 찾아본 적이 있다. 영미권에서는 책 좋아하는 사람을 한국과 똑같이 '책벌레'라고 한다. 동남아시아권에서는 '책벼룩'이란 표현을 쓴다. 책에 실제 벌레가 살기 때문에 나온 말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는데, 유럽 쪽으로 가니 쥐에 비유하는 단어를 종종 쓴다. '책 읽는 쥐', '도서관 생쥐(Library mouse)' 등이다. 동물 중에서도 하필 벼룩이나 쥐에 비유한 걸 보면, 예나 지금이나 독서가는 소수파로 뭔가 양지보다는 음지에 어울리는 존재였던 모양이다.
'책 읽는 사자'라든가 '책 송골매'처럼 좀 긍정적이고 진취적이고 주류적이고 높은 이상을 표현한 비유는 없을까? 실망스럽던 차에 아이슬란드인들의 관용어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아이슬란드에서는 독서 애호가를 '책 읽는 말(Reading horse)'이라고 한다. 말(馬)의 어떤 측면을 책과 연결시킨 것인지 까지는 밝혀내지 못했으나, 일단 좀과 벼룩, 생쥐에 비해 긍정적이고 폼 나지 않는가.
아이슬란드 사람들의 독서 선호도는 세계 제일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제주도민의 절반에 불과한 인구 30여만 명 정도의 나라에 자기 책을 낸 저자가 3만 명이 넘는다. 열 명에 한 명은 저자, 세 집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경우라면 그 중 한 집에는 반드시 저자가 산다는 이야기다. 이 나라에도 반상회 같은 게 있다면, 그 풍경이 참 궁금하다.
현재 재임 중인 아이슬란드 구드니 또르라시우스 요하네손 대통령은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역사학자이며 그의 부인 엘리자 리드는 사업가인 동시에 작가다. 그녀의 책 <스프라카르>가 최근 국내에 번역·출간 되기도 했다. 내각제인 아이슬란드에서 한때 원내 제2당을 차지했던 해적당(Pirate Party)을 만들고 이끌었던 비르기타 욘스도티르는 세 아이를 키운 싱글맘이면서 웹개발자이자 시인이다.
독서가를 쥐나 벼룩이 아니고 푸른 초원을 뛰어다니는 말에 견준 아이슬란드는 뭔가 좀 다르다. 아이슬란드는 전 세계 성평등 1위 국가이다.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이 매년 발표하는 '성(性) 격차지수' 순위에서 무려 지난 12년간 줄곧 1위를 달렸다. 여성 대졸자가 남성보다 2배나 많고,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 역시 8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다. 행복지수에서도 아이슬란드는 핀란드, 덴마크에 이어 세계 3위를 차지한다. 경제평화연구소(IEP)의 세계평화지수 순위에서도 아이슬란드는 1위에 올라 있다. 나라가 평화롭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국민 행복도가 높으면 자동적으로 상승하는 지표가 출산율이다. 출산율 1.8명으로 OECD 국가 가운데 1위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미국은 위기의 원인을 제공한 금융계 인사들을 단 한 명도 처벌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평소 입만 열면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라고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설파하던 논리와 다르게 다 쓰러져가는 은행을 세금으로 구제했다. 반면 아이슬란드는 금융 관계자 200명을 기소하고, 국가 부채를 국민 세금으로 충당하라는 채권국의 요구를 거부하며 국민을 보호했다.
물론 이런 지표나 사례가 꼭 책과 저자와 독서가를 '추앙'하는 사회 분위기 덕분이냐고 반문한다면, '그렇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인과관계를 따지려면 심층적인 사회 분석 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책벌레'나 '책 읽는 쥐'가 아닌 '책 읽는 말'의 나라는 뭔가 품격이 좀 다르다는 느낌만큼은 부인하지 못하겠다.
정희용 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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