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규장각은 왜 미국 의회도서관에 밀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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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5 21:44 | 최종 수정 2023.01.06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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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왕립도서관인 규장각을 둘러볼 수 있는 행사가 2021년 11월 중순 창덕궁 후원에서 열렸다. 1776년 즉위한 정조대왕은 그 이튿날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 건립을 명했다. 정조는 선왕인 영조의 시문을 정리하는 일을 가장 먼저 시도했고, 이렇게 정리된 선왕의 문헌을 보존하기 위해 왕실도서관으로서의 규장각을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1776년은 미국이 독립선언을 한 해이기도 하다. 당시 토마스 제퍼슨은 독립선언서를 기초했으며, 1800년 미국 의회도서관 설립을 주도했다. 흔히 책이나 도서관의 중요성을 말할 때 호학의 군주인 정조보다는 ‘나는 책 없이는 살수 없다’는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이 제임스 메디슨 대통령에게 쓴 글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집현전과 규장각 같은 왕실도서관은 있었지만 시민생활과 밀접한 공공도서관은 1901년에야 부산에 등장했다. 120년이 세월이 지난 요즘 도서관이 독서실 기능에서 벗어나 복합문화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1848년 세계 최초로 보스턴에 공공도서관을 세웠던 미국에서 도서관은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지식과 정보를 일반 시민에게 개방한 민주주의 교육 공간으로 인식됐다. 도서관은 사상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민주주의의 보루로서 역할을 해왔다. 이들 나라에서 유난히 도서관에 대한 언급이 많은 이유다.
올해 국회기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정보에는 정치가 없다’는 국회도서관장의 말이 잔잔한 화제가 됐었다. 이는 입법지원기관 정보제공의 중립성을 강조한 말이다. 반면 도서관은 정보와 달리 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국가도서관은 그 나라의 문화적 품격을 나타낸다. 1897년 건립된 미국 의회도서관은 남북전쟁을 끝내고 유럽을 넘어서고 있던 미국 문화의 정수를 모은 곳이었다. 프랑스 미테랑 국립도서관은 문화강국 프랑스의 자존심을 보여준 것으로, 40여 차례를 현장 방문하면서 도서관 건립을 주도한 미테랑 대통령의 이름을 붙였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본관인 토마스 제퍼슨관, 별관인 존 아담스관, 신관인 제임스 메디슨관 등 세 개의 건물로 구성돼 있다. 제퍼슨관이 준공된 것은 1897년으로 규장각 설립 100년 뒤의 일이다. 건물 이름은 각각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제2대 대통령 존 아담스, 제4대 대통령인 메디슨으로 했다. 1939년 개관한 존 아담스관 5층 남쪽 열람실에는 자유, 노동, 교육 등에 대한 제퍼슨의 명구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1980년 건립된 메디슨관 1층에는 메디슨 대통령 기념홀이 있으며, ‘지식은 영원히 무지를 지배할 것이다. 자기 자신이 통치자가 되려는 국민은 지식이 주는 힘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메디슨 대통령의 글이 벽면에 새겨져 있다.
얼마 전 동작구 구립김영삼도서관 입구 유리 벽면에 새겨진 미국 사상가인 랄프 에머슨의 글을 본적이 있다. ‘가장 발전한 문명사회에서도 책은 최고의 기쁨을 준다. 독서의 기쁨을 아는 자는 재난에 맞설 방편을 얻은 것이다.’ 에머슨의 글이 좋기는 하지만 이 곳에 김영삼 대통령이 도서관에 대해 한 말이나 글들이 있으면 더 의미가 크지 않을까 싶다.
국회도서관에서 올해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들의 책과 독서, 도서관에 대한 말과 글을 조사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지식과 창의력은 책으로부터 나온다”고 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도서관은 국민의 삶 속에 스며드는 생활 속 문화공간”이라고 했으며, 문재인 대통령은 “도서관은 인류의 보고이고 지식의 산실”이라고 말했다.
국회의장의 어록들도 있다. 제2대 국회의장인 신익희 선생은 1952년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 부산에 국회도서실 설치를 제안하면서 “우리의 힘이 미치는 한 우선 단 한 칸의 도서관이라도 설치해 국회의원의 사명에 만분의 1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하자”고 의정활동에 있어 도서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의화 의장은 “한 권의 책을 읽으면 한 권 만큼의 경험이 쌓인다”고 했고, 박병석 의장은 “도서관은 평생학습의 터전이자 문화를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이 언급한 책, 도서관에 대한 글과 어록이 적지 않았다. 이를 미처 찾아내고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회부산도서관 개관을 맞아 빌게이츠나 토마스 제퍼슨이 아닌 우리나라 정치지도자 어록 중 몇 개를 선정해 국회부산도서관에 전시하면 어떨까 한다. 우리나라 도서관도 더 이상 빌 게이츠나 토마스 제퍼슨이 아닌 대한민국 정치지도자나 기업인 어록이 사용되는 날을 기대해본다.
글·사진=바람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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