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사연 들려주면 오래된 책을 찾아드립니다

<헌책방 기담 수집가>
윤성근 지음
320쪽·1만5000원·프시케의숲

도서관닷컴 승인 2022.01.19 10:54 | 최종 수정 2024.01.02 18:44 의견 0

사람들이 헌책방을 찾는 이유는 여러가지다. 저렴한 책을 사거나 아니면 '오늘은 무슨 책이 있을까' 라고 가볍게 생각을 한다. 가끔은 특정한 책을 구하고자 헌책방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오래전에 절판된 책을 애써 수소문하는 것은 그 책에 담겨 있는 이야기가 있어서다.

10년 넘게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저자는 콕 찍은 책을 찾는 사람에게 수수료를 받지 않는 대신 사연을 듣는다. 참 이상하고 신기한 책방 주인이다.

이런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린 계기가 있었다. 20년 전 인터넷으로 헌책을 사고파는 것이 흔하지 않을 때 저자는 서울 금호동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헌책방에서 일했다. 어느 날 70대 노인이 찾아와 일본인 구라다 하쿠조의 책 '사랑과 인식의 출발'을 구해달라고 했다. 1963년 출판된 책이니 그곳엔 없는 책이었다. 반년 정도가 흐른 후 마치 인연처럼 그 책이 입고가 됐다. 트럭에 실려 온 수천 권의 책더미 속에 손바닥만 한 책이 기적처럼 손에 들어왔다.

"이 책이 없었다면 나는 자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귀한 책이에요, 나한테는." 그 어른이 찾아와 들려준 이야기는 책만큼이나 생경했다. 젊은 시절 일본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후 은행에서 일하던 중 예쁜 여직원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나이가 드니 문득 그 첫사랑이 생각났다. 노인에게 이 책은 젊은 시절 가슴 뛰던 첫사랑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미완의 고백 (앙드레 지드·1959년)'을 찾는 사람은 4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부모님 서재에 있던 책 중에서도 유독 낡아 누렇게 보였던 책이다. 부모님이 이혼을 통보한 날 멍하니 서재에 혼자 앉아 있다가 이 책을 읽었다. 책 내용이 운명처럼 자기 생각과 너무나 닮았다. 문장을 옮겨 적고, 매정하게 자신을 버리고 떠난 부모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책을 펼쳤다. 책은 2년이 거의 지난 후에야 구해졌다. 고맙게도 그 여성은 기다려주었다. 한 참후에 전해들은 이야기는 부모님을 직접 만나 대화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부모님이 이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하더라고요. 고등학생 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이제 와서 하려니 서먹한 기분도 들지만 잘 할 수 있겠죠?"

한국전쟁이라는 우리나라의 뼈아픈 현대사를 중심에 두고 펼쳐지는 한 인간의 속절없는 운명을 다룬 '원형의 전설(장용학·1962)'은 지금까지도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작품이다. 새 책을 팔고 있는 서점에 가면 얼마든지 살 수 있지만 초판은 찾기 힘들다. 나이가 지긋한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예전 후배에게 책을 빌려주었는데 돌려받지 못했다고 한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 모르지만 후배는 거의 20년 가까이 행방불명 상태였다. 책을 찾는 이유는 다시금 그 후배를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년 후쯤 재개발 지역에 사시던 한 어르신이 서재를 통째로 넘겼다. 거기에 이 책이 들어있었다. 어르신은 책값을 받지 않았다. 다른 분들에게 소중이 쓰이고 싶다는 말만 홀연히 남겼다. 이 일이 있고난 후 혹시 사라진 후배가 바로 이 어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누구나 가슴속에 간직하고 싶은 한 권의 책이 있다. 사랑, 가족, 기담, 인생 등 4부로 구성된 이 책에 담긴 29편의 사연은 '인생극장'이다. 헌책방에서 보물을 찾듯 오래된 책을 알아가는 과정과 함께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는 오늘도 계속된다.

김규회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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