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개봉한 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에 주인공 스캐맨더를 돕는 조력자 역할의 교수 율랄리 랠리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You know what they say. A book can take you around the world and back." 이 문장의 일반적인 번역은 "이런 말이 있죠. 책을 펼치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입니다.
덤블도어에게 비밀의 무기인 '책'을 받은 랠리 교수는 마법 세계에서의 중요 임무를 수행하던 중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때 책을 꺼내 공중에 펼쳐 보입니다. 그러자 책의 모든 페이지들이 어지러이 흩어지고 뒤엉키며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이 만들어집니다. 그녀와 동료는 책이 만들어준 마법의 길로 들어서며 위기를 모면하게 되죠.
여기에는 두 가지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앞서 언급한 영어 대사 안에 있습니다. 그 문장은 "책을 펼치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로 번역이 되었지만, 실은 '어디든 갔다(take you around the world)', '올 수 있다고(and back)'가 좀 더 실감이 납니다. 독서의 완성은 책을 통해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 여정을 마치고 되돌아온 현재의 자신이 이전과 달라지는 데까지 있습니다. 험준한 산을 오르는 클라이밍(Climbing)에 비유한다면, 도전의 이유가 새로운 산이 그곳에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정상을 오르면서 자신과 동료에게 삶의 리부팅을 선사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클라이머에게 하산까지가 진정한 코스로 여겨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하산한 후에 다른 등산 지점을 찾는 아름다운 욕망의 시작점은 끊기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독서 경험 이후의 '내'가 이전과는 다른 자아를 갖게 된다는 점에서, 책을 통한 여행은 어디든 다녀오고 난 후의 '여기'를 새롭게 하여 다른 시야를 갖추게 하는 마법과도 같습니다.
두 번째 흥미로운 지점은 책의 모든 페이지들이 공중에서 뒤섞이며 하나의 신비한 길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는 마치 페이지의 몽타주(Montage)를 통해 책 읽기를 비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몽타주는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가 강조한 개념으로, 따로따로 촬영된 필름 조각들을 창조적으로 결합해 현실과는 다른 영화적 시간과 공간을 구성해내 작품의 예술성을 만드는 이론이자 기법을 말합니다. 몽타주 핵심은 '분해'된 조각들의 '재조립' 과정인데, 한 권의 책을 구성하는 수많은 페이지들이 분해되어 공중에서 재조립되는 장면은 그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길'이 결국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인도해준다는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즉, 책과 책 읽기는 여러 페이지, 여러 문장, 여러 이미지가 독자의 읽기에 따라 시시각각 재구성되는 것이죠.
우리는 어릴 적부터 '책은 앞에서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는 규율을 암묵적으로 학습해왔습니다. 그래서 '다 읽는다'는 환상을 만들고 이에 다가가다 포기하고 좌절하는 일도 저지르죠. 하지만, 책 읽기의 본질이 이러한 순행적 읽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책이든 책의 목차, 구성, 내용, 의미를 분해하고 재조립하면서 읽을 때 비로소 '나의 길'이 새로이 열리게 됩니다. 서사가 있는 장르나 순서를 따르도록 집필한 책은 불가피하더라도 모든 책 읽기 과정에서 페이지 좌우측 하단 숫자 따라가기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영화의 이 장면이 우리가 모두 그런 몽타주를 실천할 수 있음을 넌지시 보여준 건 아닐까요.
책은 우리의 머리와 가슴에서 저마다 새롭게 재탄생할 여행로 앞에 데려다 놓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것의 지도를 펼치고 발을 내딛는 용기는 우리의 몫이죠. 그 여행의 끝은 색다른 삶, 미지에로의 시작입니다. 그리하여 끝과 시작이 만나게 되죠. T.S 엘리엇은 자신의 시 '리틀기딩(Little Gidding)'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작이라 부르는 건 끝인 경우가 많으니, 끝을 만든다는 말은 시작을 만든다는 말과 같다. 끝이란 곧 시작하는 지점인 것이다." 여름이 지나 가을이 찾아오는 요즘, 책상 한쪽에 밀어둔, 그렇게 미뤄 둔 책과 만남을 갖기에 좋은 계절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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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환
연세대학교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현대문학)을 밟고 있다. 시인의 정체성으로 작품활동을 하는 중이다. 연극과 전시를 즐겨보며, 최근에는 여행의 맛에 빠져 여행미각을 개발 중이다. 인스타그램(@ppoetyy)에도 부지런을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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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바퀴론'은 책에 바퀴가 있어 그것이 구를 때마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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