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반전]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

도서관닷컴이 전하는 상식 이야기

도서관닷컴 승인 2022.10.11 15:30 | 최종 수정 2022.10.24 14:45 의견 0

“이 전쟁은 대체 무엇입니까?” “의(義)와 불의(不義)의 싸움이다.”

포로로 잡힌 왜군 준사의 질문에 이순신은 결기에 찬 어조로 답한다.

최근 김한민 감독의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은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을 스크린에 재현해 화제를 모았다. 이순신 장군 3부작 중 '명량'에 이은 후속작이다. 추후 '노량: 죽음의 바다' 편이 피날레를 장식할 예정이다.

1592년 여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 이곳에서 조선의 운명을 건 지상 최고의 해전이 펼쳐진다.

전세를 뒤집을 수 없을 것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 조선의 영웅 이순신 장군(1545~1598)은 한산도 앞바다로 왜군을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陳) 전술을 펼쳐 적선 47척을 격퇴하며 전쟁의 흐름을 바꿨다. 일진일퇴의 공방 속에 때마침 나타난 거북선의 기습은 승리에 마침표를 찍는다. 거북선과 이순신 장군은 동서고금의 해전사에 불멸의 신화를 남겼다.

이순신 장군 하면 바늘에 실 가듯 떠오르는 단어가 거북선이다. 서울 광화문 광장의 거대한 이순신 동상 앞에도 어김없이 거북선이 자리하고 있다. 왜군들은 거북선을 '메쿠라 부네' 즉 '소경배(盲船)'라고 불렀다. 배를 바깥에서 아무리 살펴봐도 눈에 해당하는 것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북선은 명실공히 조선 수군의 대표적인 전함으로 명성을 떨쳤다.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처음 발명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유사 거북선은 훨씬 이전에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 만들어진 배가 아니다.

신라시대 때 장보고는 동아시아의 바다를 지배한 청해진(淸海鎭·전남 완도에 있던 군사기지)을 경영하면서 배 위에 방어용 등껍질을 씌운 독특한 전투선을 개발했다. 이 배는 속도가 빠르고 활이나 창을 이용한 적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마치 거북선과 흡사했다.

거북선은 고려 말부터 개발하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 태종과 세종 때에도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태종실록 13년 2월 5일 기록에 "임금이 임진강을 건너다가 귀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모양을 구경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엄밀히 말하면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발명했다기보다는 거북선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전술을 개발한 사람이었다. 기존의 거북선 모양을 바탕으로 그 위에 철갑을 씌우고 여러 기능을 보완해 많은 대포를 장착할 수 있게 발전시켰다.

이순신 장군이 타고 다녔던 거북선은 장군의 막료(幕僚)였던 나대용 군관이 개발했다. 그가 전통의 거북선을 개량해 최강의 전함으로 재탄생시켰다. 거북선은 건조 비용이나 유지비용이 많이 들었어도 성능이 검증된 까닭에 많이 만들어졌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함은 아니었다. 주력은 판옥선(板屋船)이었다. 명종 때 개발한 판옥선은 갑판이 2층 구조로 돼 있다. 그 덕분에 노를 젓는 노군들은 안전하게 노를 젓고, 군사들은 2층으로 올라가 적과 싸울 수 있었다. 배를 탈 수 있는 인원도 200명 정도여서 기껏해야 수십 명을 태울 수 있는 왜선보다 훨씬 컸다. 판옥선에는 많은 대포를 장착할 수 있었다.

거북선은 판옥선의 2층 갑판 윗부분에 둥근 덮개를 덮고 철갑을 씌운 것이다. 거북선은 승원 전원을 개판으로 보호하면서 쉽게 적선에 접근하고, 기상천외한 모습으로 적을 심리적으로 위압하는 훌륭한 군선이었다.

하지만 단점도 있었다. 노군과 활을 쏘는 사수, 포를 발사하는 포수 등 전원이 모두 개판 밑의 한 장소에 모여 있어 전투 효과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거북선은 판옥선보다 불편했다. 그래서 판옥선을 보조하는 정도였다. 실용성도 떨어져 임진왜란 5년 후 정유재란 때는 한 척도 제작하지 않았다.

*'한국아파트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김규회의 色다른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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