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환의 책바퀴론] 밑줄 그어져 있는, 도서관 책

도서관닷컴 승인 2022.12.18 11:33 | 최종 수정 2022.12.20 09:55 의견 0

도서관에서 밑줄이 그어진 책을 자주 발견한다. 밑줄의 생김새는 가지각색이다. 연필로 한 두 줄 희미하게 그은 것부터 지렁이 모양으로 꿈틀거리는 것까지. 볼펜으로 진하게 그은 것이 있는가 하면 형광펜으로 색칠을 해놓은 것도 있다. 어떤 밑줄은 자로 반듯하게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 있고, 어떤 밑줄은 위아래 문장을 침범할 만큼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동그라미와 세모와 네모가 곁들어 있는 밑줄도 있고, 각종 괄호와 기호 혹은 작은 글씨의 메모가 딸린 밑줄도 있다. 그런 밑줄의 모습들을 보노라면 표현의 개성을 실감한다.

물론 도서관의 책은 공공재이기 때문에 훼손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포털 사이트에 '도서관 책 밑줄'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했더니 수많은 결과가 나왔다. 백에 아흔아홉은 도서관 책에 밑줄 긋는 사람의 잘못을 논하는 글이었다. 남들이 그어놓은 밑줄 때문에 책 읽기에 집중할 수가 없다는 의견부터 타인에 대한 배려와 시민의식에 관한 논의가 주였다. 도서관 책에 밑줄을 긋는 사람과 이 행태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줄다리기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전 세계가 유사한 경험을 하는 중이다. 이화여자대학교 학보인 「이대학보」 1997년 3월 17일자 기사에는 「도서관 책은 내 책도 아닌데…」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자신이 도서관 책에 밑줄 그으며 읽었던 것을 실토하고 반성하는 위트있는 글이다. 이쯤이면 도서관 책 밑줄 긋기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책 앞에서 인간이 취하는 본능 아닐까하는 의심이 든다.

도서관 책 밑줄 긋기의 도덕적 정당성을 떠나 밑줄이 준 즐거움을 논해보고 싶다. 서가에서 꺼내 펼쳐본 책에 밑줄이 있을 때 종종 반가운 마음이 든다. 최근 발행된 책에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지만, 출간된 지 40~50년 이상 된 책들을 볼 때 그렇다. 누렇게 바랜 종이에 새겨진 누군가의 흔적을 보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 사람은 이 문장에 꽂혔었구나', '이 사람은 이 문장을 중요하게 생각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와 비슷한 독서 취향이나 관심사를 가진 사람의 흔적이라서 조금 더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가깝지만 아주 먼 사이인 '우리'가 이 책을 지금까지도 살아 있게 만든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감각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형광펜으로 색칠 공부를 하듯이 도배를 해놓은 밑줄을 보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것이 가끔 어려운 이론서나 철학서의 핵심 요지에 강조해 놓은 것일 땐 고맙기도 하다. 실제로 난해하기로 소문난 번역서가 도서관에 두 권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밑줄이 더 선명하게 그어진 판본을 일부러 빌려 읽기도 했다. 덕분에 보고서를 쓸 때 시간도 체력도 아낄 수 있어 유용했다. 당시 '이 사람은 누구일까?'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읽었다. '혹시 지도교수? 선배? 아니면 방금 도서관 입구에서 지나친 그 사람?' 밑줄의 모양과 색깔을 보면서 나처럼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에 고군분투하고 있었을 과거의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은 설레고 즐겁기도 했다.

프랑스 소설가 카를린 봉그랑의 책 『밑줄 긋는 남자』는 바로 이 밑줄 그어진 도서관 책에 관한 경험과 상상을 바탕으로 쓰인 작품이다. 주인공 콩스탕스는 지역 도서관에서 한 책을 빌렸는데, 그 속에서 우연히 밑줄과 메모를 발견한다. 그녀는 이 밑줄이 책을 통해 자신에게 사랑 고백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고백을 남긴 이를 찾기 위해 소르본 대학교 학생 클로드와 함께 밑줄 추적을 한다. 그 과정에서 키르케고르, 도끼, 로맹가리 등 작가의 문장은 물론 사랑과 추억, 흔적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지점들이 있다. 그래서 도서관 책의 밑줄은 한 개인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상상하고 추락시키면서, 다시 재구성해나가는 일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이처럼 도서관 책에 밑줄을 긋는 것이 분명 옳은 일은 아니지만, 어떤 이들에겐 도서관 세계를 조금 더 풍부한 상상으로 메우는 일이기도 하다. 가끔은 규칙과 도덕 원칙으로부터 살짝 빗겨나 있는 그 발칙함으로 또다른 세계를 세워 인식의 지도를 넓히기도 한다. 그 지도로 새로운 곳을 항해하는 사람에게는 반가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 글을 읽는 사람이 당장 도서관에 달려가 마구마구 밑줄을 긋지 않기를 바란다. 밑줄은 예상치 못한 곳에 드문드문 숨겨져 있을 때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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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환

연세대학교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현대문학)을 밟고 있다. 시인의 정체성으로 작품활동을 하는 중이다. 연극과 전시를 즐겨보며, 최근에는 여행의 맛에 빠져 여행미각을 개발 중이다. 인스타그램(@ppoetyy)에도 부지런을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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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바퀴론'은 책에 바퀴가 있어 그것이 구를 때마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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