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반전] 최초의 국산차는 시발? 포니?

도서관닷컴이 전하는 상식 이야기

도서관닷컴 승인 2023.02.22 10:18 의견 0

'수입차는 사치품'이라는 세간의 인식이 크게 바뀌고 있다. 국내 외제차가 10여년 만에 6배가량 폭증했다. 지난해 수입차 대수는 300만 대가 넘어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전체 자동차 등록 대수의 12.4%에 달한다. 수입차에 맞선 국산차의 신모델 경쟁과 고급화 전략도 뜨겁다. 국산차와 수입차의 정면 승부는 가히 '전차(全車)대전'이라 부를만하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달린 자동차는 '포드 A형 리무진'이다. 이른바 '어차(御車)'. 고종 황제(1852~1919)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1903년 의전용으로 미국 공관을 통해 들여왔다. 포드는 2인승으로 작고 소음이 심했다.

1955년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국인의 손으로 만든 최초의 자동차가 출시됐다. 바로 '시발(始發)'이다. 시발은 자동차 생산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한글로는 '시-바ㄹ'로 표기했다. 지프형 6인승으로 배기량 2195cc에 최고 시속 80㎞로 달렸다. 시발은 1955년 8월부터 1963년 5월까지 생산됐고, 3000여 대가 팔렸다.

시발은 수제 승용차였다. 미군으로부터 불하받은 지프 엔진과 변속기에 실린더 헤드 등 엔진 부품은 한국 기술자가 공작기계로 깎아 만들었다. 국산화율이 약 50% 정도 된다. 주요 부품을 미국 차량에서 가져왔지만, 시발을 국산차 원조로 보는 이유다. 이런 까다로운 제조 방식 때문에 시발차 한 대를 만드는 데 평균 4개월이 걸렸다.

시발은 1955년 10월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서 최우수상품과 대통령상을 차지하면서 이목을 끌었다.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처음엔 8만 환 정도 하던 차량 가격이 1년 뒤에는 택시회사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30만 환대로 치솟았다. 선금을 받고 주문을 받은 선약금만도 1억 환이 넘었다. 심지어 프리미엄을 붙여 팔려고 부유층 부녀들 사이에는 시발계(契)까지 등장했다. 1957년에는 9인승 시발 세단도 출시됐다. 6기통 엔진을 얹은 세단 가격은 대당 270만 환 정도였다. 이처럼 시발이 인기를 끌자 버스, 트럭, 트랙터 제작에도 손을 뻗었다. 시발 택시는 전국을 누볐다.

시발은 지금에 비하면 중고차 조립 수준에도 못 미치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선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정부 보조금이 끊기고, 일본산 승용차 수입이 허용되면서 추락의 길을 걸었다. 결국 닛산의 블루버드가 새나라 자동차라는 이름으로 수입되면서 시발은 단종됐다.

우리가 만든 고유의 모델이 등장하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더 걸렸다. 1976년 국산 모델 1호인 '포니1'이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까지 블루버드, 코로나, 크라운, 코티나 등은 외국 모델을 국내에서 조립한 것이었다. 한국 차가 카피카(copy car)신세를 벗지 못한 시대였다.

갓 태동한 현대차는 포드의 차량을 조립생산하는 길을 택했다. 미국 포드와 합작회사로 출발했다. 포니의 개발 이면에는 정주영(1915~2001) 전 현대그룹 회장의 불같은 의지가 빛을 발했다. 포니의 개발로 한국은 세계에서 열여섯 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고유 모델을 생산하는 나라가 됐다.

포니는 국산 1호 수출차로 이름을 올렸다. 판매 첫해에 1만 726대(대당 227만여 원)가 팔려나가 국내 시장의 43%가량을 휩쓸었고, 6월에는 에콰도르에 6대를 처녀 수출했다. 이렇게 불을 지핀 자동차산업은 지속적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하면서 1996년 사상 처음으로 수출실적 100만 대를 돌파했다.

포니는 한동안 국내 자동차의 대명사 브랜드로 위세를 떨치며 우리나라 자동차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포니가 출현하면서 '마이카(my car) 시대'를 꿈꾸기 시작했다. 지금은 마이카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그린카 시대까지 왔다. 다만 자동차 외양만을 쫓는 세태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황소개구리가 황소가 되려고 배를 부풀리다 결국 배가 터져 죽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얘기다.

*'한국아파트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김규회의 色다른 상식'

저작권자 ⓒ 도서관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