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인생2막을 '도서관 지킴이'로 사는…마음 너른 소크라테스

도서관닷컴 승인 2023.04.01 09:45 의견 0

그가 말을 걸지 않아도 나는 다가갔다. 본디 사람 만남을 좋아하지 않음에도 그를 자주 찾곤 했다. 억지와 불만이 없고 주장이 선하고 내 말보다 상대 말을 간간하게 들어주는 그 여유로움에 나는 그를 좋아한다.

"정년이 4월이잖아?"라는 내 물음에 그는 눈으로 답했다. 반쯤 웃는 눈매 위로 벚꽃이 흐드러지고 입가에 스민 봄바람은 이미 남촌을 걷는 표정이다. 그는 정년 후 여행 삼아 전국 도서관을 탐방할 생각이라며 동행을 요청했다. 그리고 고향으로 내려갈 거라고 했다. "참 세상 쉽게 산다. 나 같으면 정년 스트레스로 입이 바짝바짝 마를 텐데. 무슨 배짱이야?"라는 내 물음에 그는 "배짱은. 낮에는 해가 있고 밤에는 별이 있으면 된 거지. 거기다 책이 있는 서재 창가로 떠오르는 보름달은 또 덤이고. 그럼 됐지. 60 넘은 이 나이에 뭐가 걱정인가? 내 고향 나주는 공기 좋고 맛깔스러운 음식으로 유명하니 가끔 내려와. 잘 삭힌 홍어에 탁주 한 사발 대접할 테니" 그는 늘 그랬다. 사람이 욕심이 많으면 사악해지고 그로 인해 건강을 잃을 수 있다며 굶지 않을 만큼의 여유와 책을 볼 수 있는 두 눈과 텃밭이라도 가꿀 수 있는 사지만 있으면 족하다며 웃었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인간의 행복의 원리는 간단하다. 불만에 자기가 속지 않으면 된다. 어떤 불만으로 해서 자기를 학대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면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라고 말했다. 러셀의 이 말은 그를 두고 한 말 같았다. 그는 불만이 없다. 주변 누구에게도 불만을 말한 적이 없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인간관계 설정의 논리다. 그것은 인본주의적 낮은 자세의 철학이 몸에 배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그와 있으면 2500년 전 그리스 어느 길거리에서 소크라테스를 만난 것과 같았다. 해박한 지식과 균형 잡힌 논리,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나를 매혹시켰다.

나는 그의 요청대로 전국 도서관 탐방 여행을 함께하기로 했다. 유난히 책을 좋아한 그는 정년 후 첫 나들이로 전국 도서관을 찾아 구경하며 책을 읽고, 그리고 각 지역의 도서관을 널리 알려 많은 사람이 책 읽기를 생활화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안중근 의사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을 즐겨 쓰는 그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리 국민이 책을 가장 적게 읽는다는 통계를 보고 "아 정년 후 내가 할 일이 바로 이거구나"라며 자신이 국민독서 운동에 앞장서겠다는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일갈한 그는 인터넷판 '도서관닷컴'을 개설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며 최근 개설한 도서관 관련 전문미디어를 소개했다. 아직 미비한 부분이 눈에 띄었으나 점차 발전하리라 믿으며 이 닷컴이 전국 각 지역의 도서관을 알리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도서관을 이용하며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얻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직장인은 '60역'이라는 인생 정거장에서 내려야 한다. 그 정거장을 지나쳐 더는 달려갈 수 없다. 그 후 주어진 삶은 그저 막막할 뿐, 길이 없다. 애써 찾은 길이라야 허드렛일 또는 등산길이 전부다. 어제의 나는 없다. 이 모든 시나리오를 잘 아는 그는 정년 후 길을 미리 정해 놓은 것이다. 도서관닷컴으로 책 읽기 운동에 앞장서서 국민 의식을 일깨우고 그 변화의 바람으로 우리 모두의 지적 수준을 높이며 고향 나주에서 자연주의적 삶으로 생을 갈무리한다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나는 그 소망에 박수를 보낸다. 닮고 싶었다. 항상 자신을 내려놓고 남을 배려하며 바람과 구름과 들꽃과 꼬마잠자리 허튼 날갯짓에도 웃음 짓는 그의 여유에 나는 소크라테스를 스승으로 모신 플라톤이 되고 싶었다.

김재남 시인

*문화일보 2023년 3월 28일자(자랑합니다-김규회)에 게재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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