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반전] 한류 스타 원조는 백제의 왕인?

도서관닷컴이 전하는 상식 이야기

도서관닷컴 승인 2023.05.05 17:27 | 최종 수정 2023.05.05 17:35 의견 0

지난 3월 한일 정상의 '셔틀외교'가 12년 만에 본궤도에 오르면서 한류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일본 신한류의 성지로 불리는 도쿄 신오쿠보(新大久保) 거리는 서울 홍대 앞 거리를 연상케 할 정도로 젊은이의 문화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다.

'한류(韓流, Korean Wave‧Korean Fever)'는 세계에 부는 대한민국 바람이다. 1999년 중반쯤 중국 언론이 '한국의 유행이 밀려 온다'는 뜻으로 처음 언급한 것이 계기가 됐다. 한류는 한국이 내놓은 최고의 문화 수출품으로 대한민국의 모든 분야에 한류라는 별칭이 따라붙는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의 '2023년 해외 한류 실태조사(2022년 기준)'에 따르면 한국의 연상 이미지로 'K-Pop'이 6년 연속 1위에 올랐다. '한국 음식', '한류 스타', '드라마', 'IT제품·브랜드'가 뒤를 이었다.

스포츠 한류 열풍은 한때 대단했다. '농구의 신'으로 불린 신동파는 1969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ABC농구선수권 대회에서 한국 팀이 우승하는 데 결정적 수훈을 세웠다. 결승전 상대는 당시 아시아 농구 최강이라고 자부하는 필리핀. 필리핀은 신동파가 혼자서 무려 50점의 골 폭탄을 쏟아붓는 바람에 패배의 눈물을 삼켰다. 결국 한국 팀은 95 대 86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때부터 필리핀 국민들에게 신동파는 경외와 우상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1970년대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는 '신동파 양복점', '신동파 빵집' 등 신동파의 이름을 붙인 상점들이 즐비했다.

일본에서 한류가 본격적으로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 당시 한류 열풍을 주도한 것은 드라마였다. NHK 위성방송이 2003년 4월 드라마 '겨울연가'를 방영하면서다. '겨울연가'와 '대장금'은 한류 확산의 일등공신이었다. '겨울연가'는 배용준이라는 한류 스타를 배출했고, '대장금'은 한국 음식 붐을 일으키며 이영애를 한류 스타의 반열에 올려놨다.

특히 배용준은 '욘사마(배용준을 부르는 일본식 존칭)' 신드롬을 일으키며 한류 열풍의 진원지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한류에 흠뻑 빠진 부인들이라는 '한류처(韓流妻)'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많은 일본 여성들이 '겨울연가' 이후 한국 문화에 푹 빠져들었다. 그래서 한류라는 시대의 키워드를 만들어낸 일등공신을 꼽으라면 자연스레 배용준을 떠올리게 된다.

그럼 배용준을 한류의 원조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류 현상은 이때 처음 생겨난 일이 아니다. 한류의 역사는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시대 때 백제는 일본에 한류 열풍을 일으켰다. 왕인은 백제의 최고 한류 스타였다. 그는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갖고 가서 글과 예의범절을 가르쳤다. 이로 인해 일본은 문맹국에서 벗어나 문화국으로서의 기틀을 다졌고, 아스카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도쿄의 우에노(上野) 공원에는 왕인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백제인 미마지(味摩之)가 일본에 전했다는 기악(伎樂)은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한류로 꼽힌다.

조선통신사는 백제, 통일신라의 맥을 잇는 한류 지킴이였다. 통신사는 조선후기 에도(江戶) 시대에 1607년부터 1811년까지 모두 12차례에 걸쳐 일본에 파견된 외교사절. 통신사는 문화적으로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달하는 창구역할을 해 일본 문화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통신사 사절에는 정식 외교사절 외에 유학자와 내로라하는 조선 최고의 문인과 예능인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방문하는 곳마다 서화·시문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통신사의 숙소에는 군중이 항상 구름 떼처럼 모였다. 사람이 몰리는 광경은 지금의 한류 팬과 흡사했다.

한류의 힘은 고대에서 현재와 미래로 계속 이어진다.

*'한국아파트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김규회의 色다른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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