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신의 도담이] '조용한 공부방'…도서관은 정보의 바다이고 싶다

도서관 속에 담긴 이야기들 : 첫 번째- 현실(1)

도서관닷컴 승인 2024.02.14 10:09 | 최종 수정 2024.02.14 13:29 의견 0

시대가 달라지면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진다. 이런 변화 가운데 대표적인 경우가 만화다. 어린 시절 동네 어귀에는 적지 않은 만화방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만화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친구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래서 만화방을 들락거리는 일은 가능하면 어른들에게 들키지 말아야 하는 소소한 일탈이고 비밀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만화는 문화산업의 당당한 주역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사회적 영향력을 구가하고 있다. 만화는 정보통신기술과 만나면서 웹툰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인기를 끈 작품들은 영화나 TV 드라마, 소설로 다시 제작되면서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부분의 웹툰이 오락과 흥미 위주의 경향을 띄고 있지만, 일부는 사회적 문제에 관한 이슈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경우도 없지 않다. 윤태호의 웹툰 <미생>은 대기업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장그래라는 청년의 일상을 다루면서 우리 사회에서의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제기했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TV드라마가 방영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가 사회적 공분으로 떠올랐고, 비정규직 보호를 위한 입법으로 연결되는 커다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미생>이 불러 온 사회적 파장과 영향만큼은 아니지만, 곽인근의 웹툰 <당신과 당신의 도서관>은 취업난에 허덕이는 우리 시대 청년들의 고단한 삶을 그리면서 많은 공감과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도서관 열람실 수험생들 주로 이용

대학을 졸업하고 4년째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는 주인공 이용덕. 그는 계속되는 낙방으로 인해 애인과도 결별하게 된다. 그런 그가 하루를 보내는 공간이 다름 아닌 도서관이다. 여기에서 도서관은 오늘의 우리 현실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축소된 공간이다.

수험생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서관 열람실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시험 준비를 한다. 이들이 도서관을 찾는 까닭은 도서관에 비치된 책을 읽기 위한 것도, 문화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이들에게 도서관은 단지 시험공부에 매진할 수 있는 아주 조용한 공간일 뿐이다. 도서관에 머물면서 이들이 배우는 것은 선대의 지혜와 지식도, 이웃과의 연대와 협력도 아니다. 정글 같은 세상의 치열한 경쟁을 뼛속 깊숙이 각인하는 일 뿐이다.

사실 지금껏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도서관을 이용하는 데 너무나 익숙해 있다. 도서관은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찾고 탐험하고, 학습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무거운 수험서를 가방 속에 넣고 찾아가는 공부방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사정들은 비단 작품 속의 석주도서관뿐만 아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으로 불리는 유수한 대학들의 도서관에도 예외가 없다. 서울대 도서관은 평소 각종 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열람실의 절반 공간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다가 시험 기간이 되면 열람실은 발 디딜 틈이 없게 된다. 이러한 시험철 진풍경으로 심야 셔틀을 운행하기도 하고, 생활협동조합에서는 도서관 매점 운영 시간을 새벽 2시로 연장하기까지 한다.

방대한 자료 먼지 쌓이며 방치

학생들이 대학 도서관을 기껏해야 고시 공부나 시험 준비를 위한 공간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들에게 도서관의 방대한 자료들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시험지의 정답을 찾기 위해 도서관 열람실을 점령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 보고 있으면 시험 기간의 밤을 밝히는 도서관의 불빛이 결코 따뜻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환한 불빛들이 안쓰럽고, 애잔하고, 쓸쓸하게 느껴진다. 출판평론가 표정훈은 "우리나라의 도서관은 진학과 취업을 위한 고투의 장소이고, 당장이라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좋을 입원실과 비슷한 장소가 되어 버렸다"고 꼬집는다.

그들에게 도서관은 무한한 지식의 세계에서 길을 잃는 황홀한 경험을 제공하는 곳이 아니다. 진학과 취업에 성공해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공부하기 좋은 장소일 뿐이다. 시름하는 청춘들이 모여서 닥친 시험 전선과 씨름하는 곳이 바로 우리나라 도서관의 현주소다.

이 생생한 현실이 그래서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은 정숙이라는 암묵적인 규칙이다.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은 모두 배격해야 하기에 애석하게도 소음 또한 결격 사유가 되어 버렸다. (계속)

한성대 디지털인문정보학 트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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