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신의 도담이] "쉿!"이 아닌 정보 소통의 공간을 기다리며

도서관 속에 담긴 이야기들 : 첫 번째- 현실(2)

도서관닷컴 승인 2024.03.04 10:46 | 최종 수정 2024.07.17 14:23 의견 0
사진=도서관닷컴

은승완의 소설 <도서관 노마드>는 도서관을 생활의 근거지로 삼는 무명작가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소설 속 화자는 도서관 노트북 열람실에서 대필 작업을 하면서 근근이 살아간다. 그는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도서관 이용자들과 갈등을 빚는다. 그가 주로 이용하는 공간은 도서관의 책을 이용하고, 노트북 작업에 허여된 공간이지만, 그런 구획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도서관은 이미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 점령해 버렸다. 수험생들에게 그의 타이핑 소리는 배격해야 할 마땅한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급기야 그는 수험생들과 소음 문제로 다투기까지 하면서 도서관 출입을 정지당해 독립된 작업실을 잃고야 만다.

여전히 조용하지만 치열한 전쟁터

아르헨티나의 대문호 보르헤스는 도서관을 우주에 비유했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대우주와 같은 환상적이고 지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에게 도서관은 우리 시대 떨거지들의 피난처이고, 갈 곳 없는 무소속들이 별 눈치 보지 않고 찾아갈 수 있는 안식처, 비주류들의 교두보일 뿐이다. 보르헤스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딴 나라,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진단이다. 그래서 우리 도서관은 이 땅의 가혹한 현실에서 더 이상 뒤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 버텨야 하는 조용하지만 치열한 전쟁터라고 인식한다.

소설 <도서관 노마드>에서 우리는 이전과는 조금은 달라진 우리 사회와 도서관의 변화를 감지하게 된다. 작가가 떨거지라고 폄훼하는 도서관 이용자들은 단지 수험생만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퇴출된 회사원, 망한 자영업자, 돈 없는 노인, 엘리트 룸펜, 무명 번역가, 무명 소설가, 지식 프롤레타리아 등이 취업낭인과 함께 예전의 공부방과는 다른 용도로 도서관을 활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새로운 존재들은 도서관을 지배해 왔던 기존의 질서인 정숙과 불화를 겪으면서 대립하고 갈등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도서관을 이용하는 이들은 필연적 기존 세력과 갈등을 벌일 수밖에 없는 일종의 신진 세력이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중요한 건 도서관이 소통의 공간이란 겁니다. 독서 행위 자체가 이미 죽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살아 있는 사람들, 그들이 절실하게 뱉어낸 말들과 소통하는 자리여야 하는 것 아니냐 이 말입니다"라고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펼쳐 보이기도 한다. 이런 일갈은 이제부터 일어날 변화의 지향점을 설파하는 것이고, 크나큰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인공은 평소 다니던 도서관에서 쫓겨나 이 도서관 저 도서관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주인공과 이용자 사이에서의 갈등은 현재 우리 도서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다. 그동안 우리는 도서관을 고요하고 적막한 학습 장소로 애용해 왔다. 그런데 다른 방식으로 도서관을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새 방식이 기존 방식과 충돌하면서 또 다른 질서를 찾아가는 것이다. 변변한 작업실을 갖지 못한 무명작가도, 돈 없는 노인도, 지식 프롤레타리아도, 도서관 이용에 관해서 이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작가는 도서관이 떨거지들을 위한, 무소속을 위한, 비주류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다소 냉소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실제 도서관은 그런 사람들을 포용하기 위해 마련된 사회적인 안전장치 가운데 하나다. 이들에게 우리 사회가, 공동체가 제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그래서 그들이 편안하게, 눈치 보지 않고 노트북 자판을 두들길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하는 일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도서관은 누구에게나 지식과 정보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공동체의 든든한 어깨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자 도정일 교수는 우리처럼 빈부의 골이 깊어지는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주목하고 키워가야 하는 공간이 바로 도서관이라고 주장한다.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책을 자유롭게 볼 수 있게 하는 위대한 민주기구이고, 과거, 현재, 미래가 만나고 기억과 상상력이 용접되는 곳이라고 도서관을 바라본다.

누구나 찾는 지식의 오아시스 되어야

도정일이 이야기하는 도서관은 아직 이 땅에는 등장하지 않은, 보르헤스의 천국일 지도 모르겠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 도서관의 현실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기는 아직은 어렵다. 그렇지만 도서관은 단순한 공부방이 아니라 국경과 인종과 계급이 영원히 퇴각한 코즈모폴리턴의 세계, 지식의 사냥터, 영혼의 무도회장이 되어야 할 필요만큼은 충분하다.

도서관은 조심스럽게 사뿐사뿐 걸어야 하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만화방을 불량 청소년들이나 들락거리는 비호감적인 장소로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의 생각일 지도 모르겠다. 만화가 문화콘텐츠 산업의 당당한 주역으로 자리매김한 것처럼, 도서관이 지식을 익히고 생산하는, 그래서 생동감과 활력이 넘치는 장소로 재부팅하는 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고 기대한다. 취업에 시름겨운 청년들뿐만 아니라, 지식에 목마른 누구나가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오아시스. 그런 도서관이 될 날을 기다린다.

한성대 디지털인문정보학 트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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