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57년 만에 만난 깨복쟁이 친구야!
코흘리개 조무래기들 이젠 백발의 주름진 얼굴로
수십 년 떨어져 살았지만 함께 놀았던 추억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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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6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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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포 홍어거리를 지나 강이 잠시 머뭇거리는 앙암바위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내 고향 진포리가 나온다. 가야산과 개산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윗동네와 아랫동네를 먹여 살리고 평촌을 돌아 지금은 전설 속으로 사라진 잠잔뚱 너번들까지 먹여 살렸다. 마을은 크지 않아 가족처럼 정이 오가고 방죽에서 피어오른 물안개는 가난한 집 아이들만 골라 안아 주었다. 이른 새벽 뿌사리를 앞세워 방죽길을 따라 논으로 가던 아버지가 새벽잠에 뒤척이는 물안개를 위해 슬그머니 고삐를 늦추면 뿌사리도 무슨 말인지 알아차렸다는 듯 보름달 같은 두 눈을 껌뻑거리며 느리게 걸었다.
마을 앞 영산강이 목포에서 흑산 홍어를 싣고 올라온 통통배에게 선잠 든 엄마의 팔베개처럼 물길을 내주면, 코흘리개 조무래기들은 고무신을 벗어들고 맨발로 배를 따라 뛰었다. 뛰다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흐르면 흙으로 쓱 문지르며 다시 뛰었다. 조금 때가 되면 물길 모른 배가 삼각주 뭍에 여지없이 걸려들고 옴짝달싹 못 한 배는 만조까지 몇 날을 기다려야 했다. 그때 조무래기들은 깔깔거리며 돌을 던지고 놀려대며 도망을 쳤다. 윗동네 오치관, 아랫동네 김인찬, 평촌 박상구, 너번들 최희순, 잠잔뚱 남숙희. 마을의 대표 주자였던 우리는 60년대 진포리의 짱이었다. 우리가 휩쓸고 간 수박밭 참외밭은 보리피리 삘릴리 배고픔이 죄었다. 6.25의 상흔이 마을 구석구석 남아 있던 시절 착한 동심보다 허기가 먼저 밭고랑을 누볐다. 그중 기와집 아들 상구는 망을 보고 초가집 아들 치관이랑 인찬이는 숙달된 솜씨로 밭두렁을 땅강아지처럼 누볐다. 그러다 재수 없이 들키는 날 뙤약볕 아래 허수아비 신세가 되었다.
영산포에서 십여 리쯤 떨어진 오지마을 진포리는 유달리 정이 많은 동네였다. 마을에 초상이 나면 마을 사람들은 일손을 논두렁에 던져두고 모두 차일 안에 둘러앉아 밤새 위로의 술잔을 나누었다. 다음날 취기 어린 상두꾼의 요령 소리는 북망산천으로 떠나는 선자의 넋을 달래주고 애잔하고 구성진 상엿소리는 차마 마을을 떠나지 못해 동구 밖 당산나무를 맴돌았다.
60~70년대 시골은 3대가 함께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야말로 대가족이었다. 어른들은 들에 나가 일을 하고 조무래기 우리는 무더운 여름이면 영산강 물을 뿜어 올린 양수장에서 떼 지어 물놀이했다. 높은 미끄럼틀도 없고 흔한 튜브 하나 없어도 눈을 질끈 감고 한 손으로 코를 막고 또 한 손으로 사타구니 가리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모습을 몰래 훔쳐본 최희순 남숙희는 어린 동심에도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돌리곤 했다. 한 마을에서 낳고 함께 자란 깨복쟁이 친구인 우리는 초등학교 6년을 함께 다니며 공부보다 물놀이가 더 신이 났다. 전기가 없던 시절 산에서 땔감으로 쓰일 나무를 하고 소먹이 깔 베는 일이 곧 숙제요 다음 날 선생님의 회초리였다.
개산과 가야산이 맞닿은 중간지점을 넘고 몇 개의 마을을 지나야 지금은 폐교된 동수국민학교가 있었다. 진포리 개태 텃골 오량리 등 주변 마을에서 모여든 조무래기들은 차가 지나가면 뿌연 먼지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신작로를 따라 뛰었다. 책보를 등에 사선으로 메고 신나게 뛰면 필통 속 문화연필은 찰랑찰랑 연필심을 멍들게 하고 하필 시험 때 되면 이미 멍이 든 심은 덧셈 뺄셈을 뚝 뚝 분질러 먹었다.
6년은 길지 않았다. 빛나는 졸업장을 받아 든 우리는 일찍 헤어졌다. 몇은 중학교로 또 몇몇은 가난한 들꽃 따라 도시로 흩어졌다. 그 길이 수십 년 동안 이산의 동심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영산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나무토막처럼 도시의 그늘진 곳만 골라 흘러갔다. 숙식 제공이란 말이 사회적 화두였던 시절 어떤 직업이 장래가 밝은지 어두운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우선 먹여 주고 재워주는 곳이 미래요 희망이었다. 그때의 깨복쟁이 친구들이 57년 만에 다시 만났다. 조무래기에서 백발의 주름진 얼굴로 돌아왔다. 친구야, 깨복쟁이 친구야, 너번들 수박밭에서 옛 솜씨 한번 발휘해 볼까?
글·사진=김재남 시인‧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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