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환의 책바퀴론] '책의 색'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

도서관닷컴 승인 2022.11.08 16:32 의견 0

우리는 책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주제나 내용에 한정해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책의 두께는 글이 내재하는 사유의 깊이가 정한다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책'을 글, 편집 방법, 속지, 표지, 모양, 디자인, 질감 등 여러 요소가 모여 구성된 '전체'라고 볼 때, 책은 하나의 '신체'처럼 다가온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물으면 선뜻 단 한 부위로 대답이 모이기는 힘들 것이다. 심장? 눈? 머리? 혹시 폐? 아니면 머리카락? 하물며 미세한 솜털이 삶에서 중요한 순간이 있다. 마찬가지로 책의 부분적 물질성은 때때로 그것의 내용만큼이나 특정 상황과 맥락에 따라 중요한 기능을 한다.

그중에서도 책의 색깔에 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가장 가까운 책꽂이에 꽂힌 책의 색들을 살펴보자. 책등, 표지, 띠지마다 다양한 색을 띈다. 이들 표면 위의 글자 색도 다양하다. 종이의 색도, 책갈피의 색도 저마다 다르다. 특정 출판사마다 강조하는 색이 있는가 하면, 주제 시리즈별로 색을 맞춘 것도 많다. 얇고 기다란 책등 안에서도 저자명의 글자 색과 책 제목의 글자 색이 다른가 하면, 비슷한 색임에도 그 명도와 조도를 차이나게 한 경우도 있다. 우리는 어떤 책을 떠올릴 때 그것의 색상을 먼저 떠올릴 때가 있다. 가령 민음사의 '민음의 시' 시리즈의 흰색 배경, 문학과지성사의 빨간 출판사 띠, 문학동네 시인선의 다색상 스펙트럼 등이 그렇다. 필자도 초등학교 3학년 당시 읽었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이 가끔 생각나는데, 그럴 때마다 그 책의 표지색부터 떠오른다.

책의 색은 불현듯 특정 책을 생각나게 하고, 우리의 시각과 뇌에 각인된 책의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보는 방식에 가장 심혈을 쏟는 회화 작가에게도 비슷한 고민이 있었던 듯하다. 미술에서도 책은 중요한 소재이자 대상이었는데, 책의 색 역시 중요한 은유였다. 그림 <프랑스 소설책과 장미 한 송이가 있는 정물>(사진)은 1887년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작품이다. 그림에서 보듯 '노란' 책들이 쌓여 있고 흩어져 있다. 한국의 정서에서 '노란'의 상징적 의미가 쉽게 와닿지는 않지만, 당대 유럽인들에게 노란색의 책은 아방가르드(Avant-garde·전위예술)하고 혁신적인 성격의 현대 소설을 의미했다. 따라서 고흐에게 노란 책들은 예술가로서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시대정신, 부모 세대의 칼뱅주의적(과도한 종교주의적) 가치관 및 도덕률과 이별하려는 의지의 표명이었던 것이다. 영국에서도 '옐로백'이라는 노란색 책은 종종 '현대성'과 '진보'의 마케팅 상징이기도 한 사실을 고려하면, 서양 책 문화사에서 노란이 단순한 컬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 문화사에서도 색이라는 표면이 내용과 한 몸으로 이해되는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바로 '빨간 책'이다. 빨간 책은 어떤 '금기'의 상징인 동시에 '금기의 위반'을 의미했다. 가령 특정 시기에 사회주의 사상을 담은 어떤 책들이 불온서적으로 분류될 때 사람들은 그것을 '빨간 책'으로 부르곤 했다. 이러한 색의 정치성은 위험, 금지, 죽음을 표명하는가 하면 혁명, 불꽃, 투쟁의 열기를 표명하기도 했다. 빨간이라는 책의 한 속성은 시대에 따라서 변하기도 했다. 어느 맥락에서는 빨간 책이 성인, 욕망, 매혹으로 통용되기도 한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금기와 위반을 매개하는 책들의 표지가 실제로 빨간 그 자체였던 것은 아니나, 오늘날 여러 출판사의 마케팅에서는 그 용례가 빈번히 등장한다. 한편으로는 빨간이 의도적으로 책의 정치색을 드러내기도 하고, 우리의 집단 무의식 또는 선입견과 혐오를 전달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우리가 책의 색깔을 통해서도 그 내용과 호흡하는 존재였음은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책의 색이 어떤 정치성을 가지고 있든 간에, 색깔은 책이라는 신체에 한 겹의 옷을 입히는 미학적 과정이다. 책이 진열된 서가나 책장에서 그들은 당장이라도 그곳에서부터 외출할 준비를 한 셈이며, 수많은 이들의 참여와 노력을 통해 완성된 디자인이다. 책의 색은 개성의 표현이자 개성의 실현 자체인 패션쇼이고 예술이다. 그리고 그 색을 잘 살펴보면 속을 드러내고 감추는 방식이 잘 설계된 하나의 세계다. 우리는 책의 일부이면서 전체가 되기도 하는 그 세계를 존중하고 맘껏 감상한다. 부분이며 전체인 하나의 세계를 마주하는 즐거움을, 우리는 이미 세계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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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환

연세대학교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현대문학)을 밟고 있다. 시인의 정체성으로 작품활동을 하는 중이다. 연극과 전시를 즐겨보며, 최근에는 여행의 맛에 빠져 여행미각을 개발 중이다. 인스타그램(@ppoetyy)에도 부지런을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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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바퀴론'은 책에 바퀴가 있어 그것이 구를 때마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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