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반전] 한국 최초 고속도로와 최고의 고속도로

도서관닷컴이 전하는 상식 이야기

도서관닷컴 승인 2023.08.10 16:02 의견 0

서울-양평간 고속도로 사업을 둘러싼 정치권의 갑론을박이 '치킨게임(Chicken Game)'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걷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길이 되는 것이다." 중국의 지성 뤼신(魯迅·1881~1936)의 말이다.

길에 관한 추억의 풍경은 그때그때 달랐다. 산길, 마을길, 골목길, 오솔길, 논두렁길 등. 옛길은 소도 다니고 마차도 다녔다. 그러다가 신작로(新作路)가 생겼다. 신작로는 1906년 우리나라 최초의 치도(治道)계획이라 할 수 있는 '7개년 도로개수 계획'을 수립·시행하면서 신설됐다. 신작로는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근대적 도로였다. 이후 나라의 동맥인 국도가 닦였다.

검은 비단길로 통하는 고속도로(Expressway). 우리나라 땅에 고속도로라는 옥동자가 탄생하기까지는 약 10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고속도로는 방대한 사업규모 및 투자액, 광범위한 건설효과로 대운하 사업에 비견된다.

대한민국 최고의 고속도로는 누가 뭐래도 경부고속도로다. 경부고속도로는 대한민국 도로 혁명의 새 장을 열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나라에서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불굴의 의지로 만들어낸 역사 드라마다.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1일 착공해 1970년 7월 7일 개통돼 올해 53번째 생일을 맞았다. 정부는 7월 7일을 '도로의 날'로 제정해 기념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는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서 부산 금정구 구서동까지 이르는 총연장 428㎞(현재는 직선화 등으로 416㎞)의 거리.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였다. 국가적 역량이 총동원됐다. 대역사에 165만 대의 중장비와 연인원 892만8000명이 동원됐다. 1967년 국가 예산의 23.6%에 해당하는 429억7300만 원의 막대한 비용이 투입됐다. 안타깝게도 건설 과정에서 77명의 귀중한 목숨이 희생됐다.

이 역사 드라마의 주연은 고 박정희(1917~1979)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1967년 대선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전격 발표했다. 경부고속도로 구상은 1964년 박 대통령의 서독 방문 때 서독이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기반으로 경제부흥을 일으킨 점에 영감을 얻었다. 야당을 중심으로 일부 언론과 지식인들은 "차도 없는데 웬 고속도로냐", "이용 차량이 없을 것이다", "일부 부유층의 호화 유람로가 될 것이다", "국가 재정이 파탄 날 게 뻔하다" 등의 이유를 들어 격렬히 반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계획보다 1년 앞당겨 1970년 7월 대전~대구 구간의 개통을 끝으로 2년 5개월에 걸친 공사가 마침표를 찍었다. 박 대통령은 축하 샴페인을 도로에 뿌리며 "가장 싼 값(1㎞당 약 1억 원)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대 예술작품"이라며 감회에 젖었다. 경부고속도로는 명실공히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바꿔 놓은 산업화의 대동맥이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후 서울과 부산의 운행 시간이 15시간에서 4시간대로 획기적으로 단축됐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의 최초 고속도로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 땅에 처음으로 고속도로가 등장한 것은 경부고속도로보다 1년 반 정도 앞선 1968년 12월 21일의 일이다. 이날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29.5㎞거리의 4차선 도로인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돼 국내 고속도로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간선 도로도 제대로 포장돼 있지 않았던 당시에 자동차 전용의 고속도로가 생겼다는 것은 그야말로 꿈의 실현이었다.

경인고속도로는 1967년 3월 24일 착공해 21개월 만인 1968년 12월 21일에 준공, 개통됐다. 경인고속도로 공사 중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시작됐다.

경부고속도로가 1970년대 오프라인 고속도로의 신기원을 열었다면, 21세기에는 유·무선 초고속 인프라인 온라인 고속도로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한국아파트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김규회의 色다른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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