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신의 도담이] 칼 세이건과 박완서가 들려준 이야기

도서관 속에 담긴 이야기들 : 두 번째 이야기- 기억

도서관닷컴 승인 2024.03.25 16:55 | 최종 수정 2024.03.25 17:05 의견 0
사진=도서관닷컴

기억을 뜻하는 영어 단어 'Memory'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에서 비롯됐다. 므네모시네는 예술과 학문의 신으로 알려진 뮤즈(Muse)라는 아홉 여신들의 어머니다. 신화에 따르면, 기억은 므네모시네가 인간에게 가져다준 선물이다. 기억 없이는 누구도 뮤즈들이 선사하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선율을 느낄 수 없다.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역사도, 문학도, 예술도 존재할 수 없음을 신화는 넌지시 알려준다.

기억은 일상의 평범한 일들과 같은 단순한 정보뿐만 아니라 고난도의 지식과 정보를 획득하고 저장하는 능력을 뜻한다. 기억은 인간 행동의 가장 두드러진 측면 가운데 하나로, 문제 해결과 삶의 연속성 확보를 위한 필수 장치다. 개인적인 정체성의 연속을 위해서, 사회의 진화와 연속 그리고 문화의 전수를 위해서도 기억은 필수적이다. 기억의 힘에 기대어 인간은 학습 능력을 신장하고, 문화를 축적하고, 공유하고 전승할 수 있었다. 2000년 노벨상 수상자인 에릭 캔덜에 따르면 기억은 인류가 생물학적 진화와는 구별되는 문화적 진화를 이룩할 수 있도록 이끈 숨은 원동력이다.

도서관은 인류사 기억의 물류 창고

이런 기억과 인간 진화의 과정을 세계적인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도서관과 연결해서 설명한다. 도서관은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유전자 외부에 저장하기 위해서 인류가 고안한 공용 저장소이고, 신체 밖에 마련한 또 다른 두뇌가 되어서 문명사를 이끄는 중추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공동체의 삶에 도움이 되는 세상의 깊은 원리를 문자로, 책으로 남겨서 도서관을 통해 공유했다. 도서관에는 신화와 법률을 비롯한 공동체의 유지와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기억들이 차곡차곡 저장됐다. 이 기억들은 새로운 지식과 또 다른 기억의 재료가 되면서 문화적 진화를 이끌었다. 도서관은 책 속에 담긴 위대한 스승들의 지혜와 가르침에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줌으로써 새로운 지식과 문화의 생산을 돕는 '기억의 물류 창고'라고 세이건은 설명한다.

박완서는 한 에세이에서 이 '기억의 물류 창고'가 실제로 우리에게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한 바 있다. <한길 사람 속>(작가정신, 2002)에 수록된 '재미로 또 오기로 읽은 책'에는 처음으로 도서관을 이용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담겨 있다. 국어 수업 시간에 배운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찾았던 소녀의 낯선 경험에 관한 이야기다. 온통 책으로 가득 찬 방은 소녀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황홀한 공간이었다. 그 낯설고 황홀한 공간과의 마주침은 소녀를 또 다른 세상으로 성큼 인도한다.

도서관은 소녀에게 책이라는 새로운 세상과 조우하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소녀는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그곳을 방문해 책 속의 세상으로 여행을 떠난다. 시간에 쫓겨 다 읽지 못한 <레 미제라블>을 남겨둔 채 도서관을 떠나는 순간, 소녀는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라진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가슴이 터질 듯이 분노스럽기도 하고, 엉엉 울고 싶기도 하다. 현실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 시작한 독서가 가려진 현실을 깨닫는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다. 도서관 밖을 감싸는 어둠이, 세상의 또 다른 측면이었음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수많은 책을 통해 생각의 키를 한껏 키운 소녀

이제 소녀는 더 이상 옛날의 그 소녀가 아니다. 소녀는 스스로 정신의 키가 부쩍 자란 것 같다고 느낀다. 이것이 얼마나 강렬한 경험이었는지, 박완서는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이 기억을 다시 한번 풀어 놓았다. 아마도 박완서는 그 이후에도 도서관의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그렇게 정신의 키를 한껏 키웠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스스로가 커다란 기억이 되어 이제는 우리 도서관을 알차게 채우고 있다.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경험과 사실을 정보로써 저장하는 역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지식과 문화를 성장시키고 확장하는 물적 기반이다. 도서관은 인류가 이룩한 거대한 지식 체계와 위대한 통찰을 담은 공동체의 물리적 기억이고, 그 기억을 지금의 우리와 연결하는 단단한 고리이다. 칼 세이건과 박완서가 건네준 도서관에 대한 기억들은 이제 이 글의 씨앗이 되어 또 다른 기억으로 거듭나고 있다.

눈을 들어 보라. 미래의 칼 세이건과 박완서가 지금 도서관 한편에서 책 읽기에 골몰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한성대 디지털인문정보학 트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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