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독형통] 과학기술 발전과 인간 정체성에 대한 서사

내가 행복한 이유

도서관닷컴 승인 2022.08.25 10:20 | 최종 수정 2022.08.26 10:23 의견 0
그렉 이건(Greg Egan) 지음ㅣ김상훈 옮김ㅣ532쪽ㅣ18,500원ㅣ허블

최근 SF(Science Fiction) 소설이 인기라고 합니다. 흔히 과학소설이라고 부르는 장르입니다. 이 책은 동시대 SF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오스트레일리아의 작가 그렉 이건의 한국판 특별 선집입니다. 그렉 이건의 소설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2008년 《하드 SF 르네상스1》부터입니다. 우리나라에 'SF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2019년이라고 하지만 그 이전에도 마니아층은 있었던 듯합니다. 이 책은 그렉 이건의 중·단편집 《Axiomatic》(1995), 《Luminous》(1998), 《Oceanic》(2009)를 엮어 묶은 선집으로, 열한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SF소설은 인간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미래에는 가능할지 모른다는 인간의 욕망과 기대가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작가 그렉 이건은 수학을 전공하고 대학병원 의학 부속연구소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SF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의학에 대한 지식이 풍부함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표제작 《내가 행복한 이유》는 열두 살에 뇌종양에 걸리고 수술 후유증으로 행복을 느끼지 못한 채, 서른이 되어버린 남자가 우연한 기회에 의뇌를 이식받으면서 겪는 이야기입니다. 의뇌는 망자 4천 명의 데이터가 집적되어 있는 뇌입니다. 이식 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행복감은 물론 다른 복잡한 감정도 함께 느끼게 됩니다. 의뇌의 특수 기능은 자신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과거에 느꼈던 행복과 지금 느끼는 행복이 다르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온전히 자신의 것인지 의심하게 됩니다. 연인에게 의뇌의 정체를 밝힌 후 이별을 통보받기도 합니다. 그래도 의뇌의 스위치만 누르면 언제든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적절한 사랑》은 사고로 두 다리를 절단하고 온몸이 다 망가져버린 남편의 뇌를 자신의 자궁 속에 2년 동안 보관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은 그 후 새로운 몸을 얻어 다시 아내 곁으로 돌아옵니다. 다른 몸을 가진 남편이지만 뇌는 사고 이전으로 돌아왔기에 그들은 변함없이 사랑하며 삽니다. 그럼에도 여자는 자신이 남편의 뇌를 품기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느낍니다.

작품들이 발표된 지 10~20년 정도 흘렀지만, 의학 기술은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 정도까지는 아직 못 미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소망을 반영한 연구는 어디선가 누군가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됩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그렉 이건'이 왜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고 마니아팬을 확보하고 있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그는 작품 속에서 인간의 소망과 욕망이 이루어낸 과학 발전을 다루면서도 인간 본연의 모습, 감정, 정체성, 삶의 가치 등에 대한 질문을 놓지 않습니다. 상황 묘사가 구체적이어서 속도감 있게 몰입할 수 있게 해줍니다. '국내 SF소설은 뭐가 있지?' 하면서 서점을 기웃거리게도 만듭니다.

김찬희 객원 북리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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