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인터뷰] '도쿄 모던 산책' 박미향 작가

"사회적 기억과 소통이 중요,
오래된 가치의 재발견이 기억기관이죠"

도서관닷컴 승인 2025.01.03 08:50 | 최종 수정 2025.01.03 10:01 의견 0

<도쿄 모던 산책>의 박미향 작가를 두 번 만났다. 한 번은 책에서, 한 번은 식당에서다. 그를 만나기 전, 책의 첫 문장을 암송하듯 서너 번 읽었다. '여행이나 낯선 곳에서의 생활을 복기하며 기록할 때, 우리의 마음은 이미 시인이나 예술가가 된다.'

-'기록 시인 예술가' 의 단어들 간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나요.

기억기관을 엮어내는 방식에 있어 되도록 제가 아는 인문학과 접목을 해보려고 애썼습니다. 일본 근대시대 대표 문인인 나쓰메 소세키의 마지막 안식처인 조시가야영원 묘지공원이 그 한 예입니다. 소세키가 1914년 당시 메이지시대 고독한 지식인의 내면을 그린 대표작 <마음>을 출간하는데, 소설 속에 조시가야묘지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소설에 선생님은 매달 꽃을 들고 조시가야를 찾아가 먼저 떠난 친구를 남몰래 추모합니다. 소세키는 이 소설을 출간하고 2년 뒤 최후의 대작 <명암>을 집필하다가 1916년 지병인 위궤양 악화로 세상을 떠나 조시가야영원에 영원히 묻힙니다. 작가는 예견한 듯 소설 속에 이곳을 언급했고, 묘하게도 이곳에 안장됐습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자신의 사후 장소를 미리 정해 놓고 소설에서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세월이 축적한 결과물에 아트스트 감성 담아

<도쿄 모던 산책>은 사진, 그림, 연표 등 상당히 정성을 들인 흔적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촘촘하고 짜임새가 있으며 내용도 충실하다. 책의 주요 키워드는 '기억기관'이다. 기억기관. 좀 낯설다. 이 외래어 같은 용어는 어떻게 쓰게 된 것일까. 작가는 서문에 '아티스트적인 감성을 더하고 싶었던 나는 스스로를 기억기관 칼럼니스트라고 칭하며…'라고 썼다.

오래된 것은 일종의 마력이 있다. 세월의 흔적으로 축적해 놓은 결과물은 그래서 더 빛난다. 공든 탑은 뚝딱 세워지지 않는다. 한올 한올 털실을 짜듯 쌓아올리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멋드러진 탑이 완성된다. 느린 달팽이가 바다를 건넌다는 말이 있다. 기억기관도 그렇다. 하루 아침에 로마가 만들어지지 않듯이 구구한 역사들이 모여 사회적 기억이라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기억기관'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요.

학계에서 원래 있던 개념이였지만, 주목을 받고 자주 활용되는 용어는 아니었어요. 국회도서관 기록보존소장을 맡아 20주년 학술행사를 준비하면서 이 용어가 정치인이나 일반인들에게 소구력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입법부내 기억기관이라는 틀에서 지난 20년을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기억기관이라는 말은 학술적 범주를 넘어 사회적 기억과 기록, 그리고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죠. 도서관을 확장하는 관점에서 기억이라는 가치를 한층 더 중요하게 받아들인 개념입니다. 한 사회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집단적 기억을 담고 계승하는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기록관 등을 아우르는 큰 지붕 같은 용어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합니다.

아오야마영원, 국립서양미술관, 조시가야영원(왼쪽부터)

-도쿄에서 인상깊었던 기억기관을 몇 개 꼽아 본다면?

어려운 질문이네요. 모두 다 나름의 의미가 있어요. 굳이 몇가지를 고른다면 개인적으론 일본민예관, 국립서양미술관, 와세다대 연극박물관, 아오야마영원 등이 될 것 같아요. 일본민예관은 예술철학자 야나기 무네요시가 당시 새로운 개념인 '민예(民藝)'를 보급해 미를 생활화한다는 목표로 설립했습니다. 우에노공원에 있는 국립서양미술관은 국제적 도시 도쿄를 대표하는 특별한 문화적 장소로 2007년 일본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어요. 전 세계 17개밖에 없는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작품 중 하나로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되기도 했고요. 와세다대 연극박물관은 셰익스피어 작품을 최초로 소개한 쓰보우치 교수의 소장자료를 기초로 조성된 대표적인 근대 건축물입니다. 현재 아시아 유일 연극 전문 박물관으로 잘 알려져 있죠. 특히 무라카미 하루키가 재학시절 좋아했던 장소로 유명하죠. 희곡 대본과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자주 방문했다고 합니다. 박물관앞 구마 겐코가 설계한 하루키도서관이 2021년 설립되어 더욱 의미가 있어졌죠. 역사적 기억의 장소로 김옥균 묘지석이 있는 아오야마영원도 기억에 남아요. 우연한 산책길에서 처음 볼 땐 놀라웠죠. 비문은 박영효가 썼다고 합니다. 김옥균이 갑신정변 후 일본에서 10여 년간 지내면서 남다른 존재감으로 일본인들에게 영향을 줬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작가는 공무원이다. 1996년 입법고시로 국회도서관에 들어가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 기간 동안 미국에서 정책학 석사학위를, 연세대에서 문헌정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단한 배움의 열정이다.

-박사 논문은 무엇에 관한 것이었나요.

석사는 미국 시라큐스대 맥스웰스쿨에서 공공정책을 공부했어요. 맥스웰스쿨은 우리로 치면 사회과학대 같은 것인데, 케네디스쿨하면 이해하기 쉬울거예요. 박사는 모교에서 문헌정보학으로 했습니다. 제 박사논문이 베이비붐세대 은퇴예정 집단의 정보이용 형태에 관한 연구였는데 마침 때를 잘 만났죠. 국방대에 파견해 있을 때였는데 각 부처에서 약 200여 명의 간부들이 모여서 동학을 했죠. 저는 좀 어린 편이었고 다른 분들은 나이가 좀 있는 선배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이 제 논문의 표본이 된 셈입니다. 당시 노령화 사회로 가는 패턴을 잘 보여주고 있었어요. 공공정책과 문헌정보는 다른 영역처럼 보이지만 각기 다른 지류들이 강이나 바다에서 결국 만나듯 유기적으로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난 도쿄와 서울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자

작가는 프로필에 '도쿄와 서울을 사랑하는 '도시 산책자', 코로나로 봉쇄되었던 도쿄에서 소피아라는 이름으로 2년간 살았다'고 적었다. 박미향이라는 이름 대신 닉네임과 이칭으로 불리고 싶은 이유가 궁금했다.

도시 산책자, 좀 독특하다. 그 이유를 묻자 도시와 산책이 어우러져 단어에서 풍기는 모던한 느낌에 근대적인 분위기도 연출하는 1석3조의 의미라고 설명했다. 소피아(Sophia)는 그리스어로 '지혜'라는 뜻이다. 국회도서관 연구회활동에서 회원끼리 별칭을 쓸 때, 그때 소피아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일본에 있을 때 이름 '美香(미향)'을 일본어(미카)로 불리긴 보다, 소피아라고 스스로를 명명해 생활했다. 이방인으로서 자유로움과 새로운 에너지를 발견하기 위해서다.

와세다대 방문학자로 갈 당시는 코로나19로 이동이 쉽지 않은 때였다. 와세다대 교수로부터 초빙을 어렵사리 받아냈지만 입국까지의 여정은 간단치 않았다. 비자가 안 나오는 바람에 입국 여부가 불투명했다. 다행히 가까스로 입국을 했지만 그땐 정말 아찔했다. 책에 당시 심경을 담은 내용이 나온다. 서문에 '코로나로 지쳐가던 시기에 어렵게 일본에 들어가 조용히 삶을 모색하며 여러 기억기관을 탐방하며 축적한 나의 기록이다'라고 쓰여 있다.

문헌정보학자이지만 영문학도 전공한 특이한 공부 이력. 2년간 일본 와세다대 연구자로 있을 때는 현대정치경제연구소 영어세미나와 줌강의를 주로 들었다. 학창시절엔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대입 때는 영문학과를 가려고 했지만 그게 잘 안됐다. 학부시절 사회학을 부전공했다. 문헌정보학과 졸업 후 복수전공으로 영문과에 들어가서는 문학에 더 집중했다. 각 시대의 작가와 작품들 이야기는 재미있고 매력적이었다. 학부를 졸업하고 미래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또다시 다른 학부 공부를 플러스하는 과정은 지난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무모한 결정과 도전이었다.

책이라는 옥동자를 낳기까지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원고를 마감하고도 책 컨셉과 맞는 출판사를 찾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출판사를 정하고도 콘텐츠 구성 등 전 과정이 난수표 퍼즐맞추듯 했다. 기획부터 책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다 합치면 꼬박 2년여의 세월. 이제 생경한 1막의 도전은 일단락됐다. 책을 출간한 후에는 독자들과 만나는 북토크 행사를 열고, 2쇄도 찍었다.

일본어 중국어 판 계획…의미 있는 도전 계속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작가로서의 시간이 어떻게 이어질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공직에 있으니 현업에 충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고요. 가능하다면 <도쿄 모던 산책>을 일본어판으로 만들고 싶어요. 중국어판도 같이요. 시즌2를 새로 기획한다면 후속작으로 1945년 이후부터 21세기 초반까지의 현대 기억기관을 다루고 싶습니다. 물론 모든 일이 쉽지는 않을거예요. 그렇지만 이 작업들이 제 작가의 길에서 의미 있는 것이라면 차근차근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

'정해진 길이란 없다. 길은 걸어가면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장자의 말이다. 1호 기억기관 칼럼니스트. 그는 만들어져 있는 길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그의 다음 서사가 기대된다.

김규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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